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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피가드너 Jun 08. 2024

친애하는 나의 아버지께!


미국은 매해 6월, 셋째 주일이 아버지날입니다. 장미가 피고, 라벤더 향기가 무르익을 이즈음에는 40여 년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가 더 그립습니다. 꽃을 좋아하셨으니 저희 정원에서 흐드러지게 핀 장미를 보셨다면, 분명 와인 한잔하자며, 함박웃음을 지으셨을 겁니다.


 49세의 짧은 인생, 남은 가족에게 행복한 기억만 남기고 홀연히 떠나셨습니다. 어쩌면 오래전이라 안 좋은 마음은 사라졌을지도 모르겠어요. 그럼에도 존경하는 사람이 누구냐는 질문을 받는다면,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아버지'라고 했을 거예요. '가정'이라는 울타리를 소중하게 생각하고 이상적으로 가꾸기 위해 무던히도 애쓰셨단 생각이 듭니다. 그게 더 감사하고, 아픕니다.


아버지는 경제학을 전공한 교수 지망생이었는데, 가업을 이어서 하라는 조부모님의 간절한 부탁으로 결혼 후, 작은 약국을 온 가족이 함께하셨습니다. 대형 도매약국으로 성장하자, 그 공을 지역주민에게 돌리고, 가난한 약대생과 의대생을 위한 장학재단도 만드셨고요. 이윤의 일부를 사회 환원하신다고 약국 이름을 딴 장학사업에 많은 공을 들이셨습니다. 서울에 오셔서는 돌아가시기 전까지 작은 제약회사를 경영 하셨습니다. 아버지의 일생을 한 편의 글로 쓰기엔 많이 외람되지만, 이렇게라도 정리해 보고 싶었습니다. 이제야 조금 철든 딸이 '고마움과 사랑'을 전한다면, 아버지도 어디선가 흐뭇한 미소로 보고 계실 거도 같고요.




아버지는 성실하고, 반듯한 삶을 사셨습니다.  

오죽하면 동네 분들이 아버지가 퇴근하는 시간을 보면 오후 6시란 것을 알 수 있다고 했으니까요. 회사가 있는 봉천동에서 서교동 집에 도착하실 때엔 의례 손에는 그날 저녁에 먹을 생선 담은 봉지가 있었습니다. 집에 오는 길에 노량진 수산시장을 들려서 오시기 때문이지요. 엄마는 부지런히 생선을 손질해 동그란 식탁에 온 가족이 앉아 식사합니다. 사이좋은 삼 남매의 하루를 들으며 흐뭇해하던 미소가 지워지질 않습니다.


저녁을 먹고 나면, 아버지는 엄마와 동네 산책을 하셨습니다. 두 분은 이 시간에 주로 자식들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누신 거 같아요. 자식 셋의 전공도 이미 초등학교 들어갈 때부터 정해 놓았는데, 그대로 진학했으니, 아버지의 통찰력이 대단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산책이 끝나면 집에 들어오셔서 책을 읽으십니다. 이 같은 생활을 병원에 입원하기 전까지 꾸준히 하셨으니 루틴 좋아하는 제가 쏙 빼닮은 거 같기도 합니다.


늘 생산적인 대화와 독서의 중요성을 실천하셨습니다.

경제에 대해, 평소에도 가정교사처럼 잘 알려 주신 덕에, 갑자기 돌아가셨어도 엄마가 무리 없이 아버지 사업을 이어서 하셨고요. 우리에게뿐만 아니라, 가까운 친척들이 모여도 현실 경제에 대한 조언을 아낌없이 나누셨습니다. '돈이 조금이라도 모이면, 은행에 가만히 두지 말고, 공부해서 주식이나 땅에 투자해라! 그래야 그게 재산이 된다."라는 말도 수없이 하셨어요. 포함, 많은 친척이 하라는 대로 했고, 선견지명이 있는 말이었습니다. 


집에 티브이가 있었어도, 가족이 함께 본 기억은 거의 없습니다. 아이들은 공부를 열심히 하는데, 부모가 티브이를 보면 되겠냐고 절대 틀지 않으셨거든요. 그 대신 아버지의 손에는 늘 책이 있었습니다. '책 읽기가 성공의 밑거름'이 된다는 것을 어릴 적부터 익히도록 하신 것 같습니다. 그런 습관 덕에 2살 터울인 남동생이 책을 좋아하고, 영특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후에 S대 법대에 수석으로 들어가고, 유능한 변호사가 됐으니까요.           

생각이 멋지고, 자상했습니다.

제가 대학에 들어가자, 제일 먼저 데리고 간 곳이 남산에 있는 체육관이었습니다. 1970-80때만 해도 취미로 운동하는 곳이 잘 없었는데, 이런 문화를 익혀야 한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운동을 좋아하지 않은 제가 오래 다닐 리는 없고, 이 핑계 저 핑계 대고 안 다니자, 아버지는 성에 안 찼나 봅니다.


그다음엔 신라호텔, 롯데호텔 등 크고 좋은 호텔과 미술관을 데리고 다니며 견문을 높이도록 도와 주셨습니다. 맛있는 것을 사주고, 다양한 말씀을 해 주셨는데, "대학에서 끝나는 공부가 아닌, 평생 사용할 수 있는 산 공부 습관을 지녀라, 옷보다 가방과 구두를 좋은 것으로 신고 다녀라." 등등 아주 세세한 것까지 말씀하셨어요. 이는 후에 살아가는 데 많은 지침이 됐습니다. 미국에 와서 용감하게 비즈니스를 한 것도 "산 공부를 해라!"는 평소의 가르침 덕이라 생각이 듭니다.    




"좋은 기억은 인생이라는 엔진을 돌리는 최고급 기름이다"란 글을 '나태주의 행복 수업'에서 읽은 적이 있습니다. 아버지와의 시간이 그랬습니다. 힘들 때마다 어디선가 나타나 저를 기운 차리게 하여 주셨으니까요.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고, 일과 가정을 조화롭게 가꾸신, 문학과 예술을 사랑한 진정한 멋쟁이이고, 로멘티스트였습니. 평소에, "가정을 잘 이루고, 자신을 멋지게 잘 가꾸고 살아라!"란 말씀도, 바른 생각으로 노력하며 살되, 여유를 가져라! 라는 말이었을까? 생각도 해봅니다.


친애하는 아버지!

그곳에서는 편안하신가요? 마지막 가시는 날은 참 더웠었는데, 날씨는 괜찮나요? 당신의 바람대로, 우아하고 멋지게 살다 갈게요. 잘 지내시다 다시 만나요. 고맙고 감사합니다.  


마지막인 줄도 모르고 달아 드린 그해 카네이션




정원산 장미로 만든 리스를 이 세상의 모든 아버지께 감사한 마음 담아 드립니다. 해피 파더스 데이!!

['서툰 인생, 응원합니다.' 연재 브런치 북은 만든 소품을 함께 올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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