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에 올라가자마자 성적은 추풍낙엽처럼 우수수 떨어졌다. 이성 친구나 다른 취미가 생겼던 것이면 이렇게 억울하지도 않다. 세상엔 공부 잘하는 애들이 너무나 많았다. 우물 안 개구리였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자신감은 급히 추락하고 아무리 발버둥을 쳐봐도 떨어진 성적은 올라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도대체 공부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감조차 잡을 수 없었다. 단지 열심히만 해서는 안 된다는 건 틀림없었다.
중학교 졸업 무렵 학교에서 성적순으로 전교 몇 등까지 몇 명의 아이들을 불러 놓고 외국어 고등학교에 갈지, 과학 고등학교에 갈지 정하라고 했다. 외국어 고등학교에 가면 무조건 영어는 기가 막히게 잘하게 되어 졸업한다는 말만 찰떡같이 믿고 외고를 지원했다. 영어를 잘해서가 아니라 잘하고 싶어서였다.
대전외고는 영어과, 중국어과, 프랑스어과, 에스파냐어과, 독일어과, 일본어과, 러시아어과로 나누어져 있다. 과를 선택하면 3년 동안 한 반으로 묶여서 해당 외국어를 다른 일반고등학교에 비해 더 배우게 된다. 기본적으로 영어 과목만도 과목을 세분화해서 영어독해, 영작, 영어청해, 영어회화… 등으로 주당 10시간 이상씩 배정이 된다. 아무래도 외고에서도 특히 영어과는 영어를 진짜 잘하는 아이들이 갈 것 같았다. 중국어에 관심이 많았지만 영어과 다음으로 잘하는 아이들이 몰린다는 말을 듣고 무난하게 에스파냐어과를 선택했다. 그리고 내 인생 최고로 암울한 시기가 시작되었다.
아이들은 다 영어를 잘했다. 나만 빼고. 기본적으로 외국에서 살 다 온 친구들이 3분의 1 정도인 이곳에서 내가 영어 단어를 아무리 많이 외운다고 해도 따라잡을 수는 없었다. 화가 나면 동생과 영어로 싸운다는 애들과 함께 공부하면서 내가 왜 이곳에 있는 것인지 후회가 막심하였다. 영어뿐만 아니라 모든 과목에서 다들 뛰어난 것 같았다.
에스파냐어는 다 같이 처음 접하는 외국어임에도 기본적으로 영어를 잘하는 아이들이어서 그런지 바로 경시대회도 나가서 상도 탔다. 한번 떨어진 자신감은 걷잡을 수 없이 아래로 추락했다. 초등학교, 중학교 수업 시간에 한 번이라도 더 발표하려고 번쩍번쩍 올렸던 내 손은 수업 시간 내내 보이지 않는 끈에라도 묶인 듯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친구들이 수업 시간에 눈빛을 반짝이며 수업을 듣는 모습을 보면 나도 모르게 고개가 점점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졸렸다. 그런데 어쩌다가 꾸벅꾸벅 조는 친구가 내 레이더망에 걸리면 정신이 번쩍 차려졌다.
‘밤새 얼마나 공부를 했길래 조는 걸까. 내가 뒤처지고 있구나!’
당시 교실 책상 옆에는 개인 바구니를 하나씩 갖다 놓고 생활했다. 사물함까지 왔다 갔다 하는 시간조차 아까워서 그날 공부할 교재를 옆에 바구니에 쌓아 놓고 공부하는 것이었다. 쉬는 시간이 시작되면 아이들이 일제히 교실 문을 나가시려는 선생님을 향해 허들 넘기 경주처럼 바구니를 뛰어넘어 질주하는 진풍경이 시작되었다.
당시 여자 친구들은 교복 치마 속에 체육복 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쉬는 시간이 되면 한 손으로 질문할 교재를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치마 줌을 움켜잡고 바구니를 펄쩍펄쩍 뛰어넘어 교실 앞쪽으로 냅다 달렸다. 수업 시간에 이해 안 갔던 부분이나 공부하다가 막힌 부분들을 질문하려고 달려드는 것이었다. 다음 수업을 위해 옆 반에 가야 하는 선생님은 화장실도 못 가시고 쩔쩔매며 영락없이 붙들려 하나하나 답변해 주셨다. 가끔은 선생님이 껄껄~ 웃으시며 수업 시간에 농담한 것도 질문하냐면서 나무랄 때도 있었다. 아이들은 그만큼 열심이었다.
난 도통 선생님께 질문할 거리가 없었다. 혹시라도 질문했다가 이것도 모르냐면서 타박을 받을 것만 같았다. 바쁘신 선생님을 하찮은 질문으로 붙들기도 너무 죄송했다. 어쩌다가 큰맘 먹고 질문을 해도 선생님의 설명 한 번으론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지만 할 일 많으신 선생님을 더 붙잡기 죄송해서 알아듣는 척을 했다. 그 뒤론 질문을 하지 않았다.
언어 영역은 그 많은 문학작품 중에서 대체 어느 부분을 공부해야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이제 와서 책을 읽는다는 것도 늦은 것 같았다. 문제를 풀어도 항상 감으로 푸는데... 이 감이란 것이 종잡을 수가 없었다. 수학 영역… 아… 정말 수학은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랄까… 남들이 몇 번을 풀었다는 수학의 정석은 앞부분만 새카맣게 되었고 뒷부분은 늘 새것처럼 깨끗했다.
학교, 학원에서 나가는 진도는 좀처럼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그나마 사회, 과학영역은 어느 정도 범위가 정해져 있어서 그 안에서 암기하면 되니 차라리 쉬웠다. 외국어 영역은 문법 부분이 도통 이해가 안 돼서 어려웠지만, 외고에서 외국어 영역이란, 절대로 한 문제도 틀리면 안 되는, 아니 무조건 다 맞아야 하는 영역이었다. 그래서 나만 틀릴까 봐 두려웠다.
버스를 타고 학교를 다녔다. 버스가 학교로 향하는 길에 통과해야하는 조금 기다란 터널이 있었다. 어떤 친구가 말했다.
“여기 터널 지나는 동안 숨을 참고 소원을 빌면 소원이 이루어진대.”
그때부터 매일 그 터널을 지날 때마다 숨을 참고 좋은 대학에 가게 해달라고 빌었다. 지금 성적으론 기적이 일어나야만 원하는 대학교에 갈 수 있었다. 터널이 꽤 길어서 빛이 보일 때쯤이면 가슴이 쿵쾅쿵쾅 뛰면서 숨이 꼴까닥 넘어갈 것 같았다. 그렇게 폐활량만 좋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