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전의 북촌이나 지금의 북촌은 그리 많이 변하지는 않았더군요. 그런데, 몇몇 식당들이 폐점을 하고 카페가 들어서려고 공사하는 걸 보았습니다. 인건비가 많이 올라서 그런가, 싶더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촌 인근은 여전히 맛있는 식당이 많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북촌을 찾아간 날은 새하얀 눈이 소복이 와서 온 천지가 하얗게 된 날이었습니다. 기와 위 흰 눈은 추운 겨울이지만 왠지 모를 따뜻함을 선사했어요. 아주 예뻤습니다.
눈 길 위를 한 시간 넘게 돌아다녔더니, 배가 출출해졌어요. 군불을 때 주어야 무쇠 솥에 김이 더 나듯, 우리 배 속에도 뭔가를 넣어주어야 할 시간이었어요.
"우리 이제 밥 먹으러 가요. 어디 갈까요?"
"근처에 맛집 엄청 많던데요. 아무 데나 가도 맛집이겠던데요."
제가 한마디 더 보탰습니다.
"진짜, 맛집으로 보이는 식당이 천지삐까리던데요."
내 말에 모두들 "까르르르" 웃습니다.
"맞아요. 맛집이 천지삐까리예요. 하하"
'응답하라 1997'이나 '응답하라 1994' 같은 방송 매체 덕분에 이제 '천지삐까리'같은 경상도 사투리는 전국구가 되었습니다. 따로 설명을 하지 않아도 전 국민이 다 알아듣는 말이 되었다는 거지요. 네이티브 경상도로서 얼마나 다행인지요. 툭 던진 말인데, 굳이 굳이 설명을 덧붙여야 할 때의 그 뻘쭘함, 연속된 대화가 끊겨서 어색함이 없어도 되니깐 말입니다.
무언가가 많다는 것을 표현할 때, 자주 쓰이는 말로는, 아주 많다, 진짜 많다, 엄청 많다, 너무 많다, 등이 있습니다. 이중에서는 '엄청 많다'를 많이 들어본 것 같습니다.
뭔가가 진짜 많아서 '하늘땅만큼' 많을 때 제가 들어본 말은 '엄~~~~~~청 많다'거나, '진짜 진짜 진짜 많다'거나, '진짜 엄청 너무 많다'같은 부사가 여러 번 반복되거나 특정 부사에 힘을 주어서 강조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제가 아는 서울 사람 지인들이 표현력이 짜치는 게 아니라면 말이죠.
이사 와서 햇수로 5년째로 접어든 저는 아직도 '엄청'이라는 말이 대단히 많다는 느낌이 들지 않습니다. 뭐 적당히 많긴 합니다만, 진짜 많이 많다는 실감이 확 들진 않아요.
네이티브 경상도에게 뭐가 많다는 말을 할 때 가장 많이 쓰이는 말은 '억수로'입니다.
"억수로 많네."
"비가 억수로 많이 오네."
"밥이 뭐가 이리 억수로 많노? 다 묵겠나?"
"니 억수로 많이 주네. 뭐 부탁할 거 있나?"
'엄청'보다 '억수로'가 더 실감 나게 느껴집니다. '억수로'도 방송 매체의 영향으로 이제는 서울 사람들도 종종 쓰는 말인 것 같습니다. 적어도 어른들한테는요. 제가 초등학생들과 체험학습 수업을 할 때, "얘들아, 궁궐에는 관광객들이 항상 억수로 많아!"라고 했다가 몇몇 킥킥거리는 아이들도 있었고 "그게 뭐예요?"라고 묻는 애들도 있었던 걸 보면, 아직 아이들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것 같더라고요.
'억수로' 다음 단계로 뭐가 많을 때 저는 '쌔비릿다'라고 합니다.
"우리 집에 이런 거 쌔비릿다"
"몽돌해수욕장에 돌빼이 쌔비릿다 아이가!"
"내한테 딱지 쌔비릿다. 니 하나 주까?"
'억수로'가 범용이라면 '쌔비릿다'는 좀 더 물건이 여기저기 널렸다, 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쌔비릿다'보다 한 수 위인 것이 '천지삐까리'입니다.
"뉴욕에는 피자집이 천지삐까리네."
"동해 바다에는 오징어가 천지삐까리로 많은 갑다."
"원동 철길에 매화가 천지(삐까리)로 많이 핏네. 예삐네."
표준말인 '하늘만큼 땅만큼'의 사투리 버전이 '천지삐까리'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저 개인적으로 입에 붙어 자주 쓰는 많다의 사투리 버전 부사는 '천지한백까리'입니다.
하늘만큼 땅만큼 많은데, 하늘과 땅이 백 개 정도 있는 만큼 많다는 느낌의 말이거든요.
냉동식품 애호가인 남편이 또 택배를 시켜 집에 배달되어 왔을 때 제가 고함을 치며 말했습니다.
"냉장고에 냉동 고기가 천지한백까린데, 또 샀나? 인자 넣을때도 없다. 쫌~!!"
어버이날 부모님 선물로 속옷을 고르고 있는 남편에게 말했습니다.
"어머님 아버님 속옷은 천지한백까리로 있을 구로. 고마 돈이 최고다. 봉투나 준비해라."
몇 년 전 친정에 김장으로 도우러 갔을 때, 뒤꼍에 있는 200 포기가 넘는 배추를 보고 질겁하며 투덜댔습니다.
"엄마, 배추 천지한백까리로 있네. 이거 언제 다 절이고 있노? 아이고 무시라~"
엄마는 말했습니다.
"이기 뭐가 천지한백까리고? 배추 알이 작아서 얼마 안 된다. 너거 오빠캉, 우리 셋이 하믄 금방 한다."
하루 종일 배추 소금물에 절이고 다음 날 씻고 그다음 날 치대고, 허리 아작 나는 줄 알았습니다.
'억수로'든 '천지삐까리'든 '천지한백까리'든 이제는 별도의 설명이 없어도 다 알아들을 정도로 널리 알려진 사투리가 되었습니다. 저에겐 정말 다행이지요. 단어 설명하느라 대화가 안 끊겨도 되니깐요.
'쌔비릿다'는 아직 많은 사람은 모르는 것 같습니다. 뭐 이것까지는 안 알려져도 괜찮습니다. 우리 식구 있을 때만 써도 되니깐요. 지인들과 있을 때는 '억수로' 많다고 해도 되고, "맛집이 천지삐까리'라고 해도 되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