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사인문학] 잡초의 죽음이 시작이다.

글쓰기를 좋아하는 도시여자가 시골에 적응해가며 끄적이는 농부되기 프로젝트

by 작가 박신


음력 3월, 봄이 왔다.

벼농사의 시작이다.


내가 경험한 벼농사의 시작은 제초.

겨울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아주 부지런히 뿌리를 내린 논두렁의 잡초들을 제대로 죽여놔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여름에 여린 벼들을 곁에 두고 다시 한 번 제초를 해야하는 불상사가 생길 수 있다.

(물론 벼가 어느정도 크면 한 여름에 제초를 한 번 더 하는데 그땐 벼가 그리 어리지 않아서 괜찮은가보다.)


무튼 벼농사의 시작이 들판과 논두렁에 자리한 잡초의 죽음으로 시작한다는 것.

다시 말해보자.

새 시작을 무언가의 죽음으로 시작한다는 것.

이것은 너무 자명한 자연의 섭리인데.

인간의 입장으로 생각하니 꽤나 서글픈 이야기가 되어버린다.


그래서 나는 잡초제거를 하며

잡초를 위해 묵념을 한다.

제초의 작업은 수십미터의 호스를 끌고 논두렁을 쭉 둘러가며 제초를 하는 사람 한 명,

호스를 감았다 풀었다 해주며 덜 힘들도록 도와주는 사람이 필요한데,

호스를 감고 풀고 하면서 멍하니 있으면

자연스레 묵념이 흘러나오는 것이다.

잡초로 태어나 비록 스스로 생을 마치지 못하고 이 독한 약에 죽어가게 해서 미안하지만,

빨리 죽는 만큼 다음엔 더 빨리 피어나서 원없이 살다 가기를 기도해주는 것이다.


[기도의 내용은 대략 이렇다]

[네가 잡초라해서 쓸모없는 인생이라 여기진 않는다.

나 역시도 잡초라서 아무도 몰라주고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지만

나는 내 생을 최선을 다해서 살아가고 있으니

잡초 너의 인생도 그리 했으리라.

하지만 벼로 태어나길 권하지도 않겠다.

처음부터 너무 기대를 받는 삶, 귀히 대접받으며 주는 물 받아먹으며

계획대로 자라나, 계획대로 심겨져, 계획대로 죽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니.

우린 그렇지 않았잖아.

제 힘으로 터를 잡았고

겨울 끝자락 속에서 부족한 해와 부족한 비로 여기까지 살아내었잖아.

다음엔 좀 더 일찍허니 솟아나와보자.

겨울이 떠나가는 것도 보고, 봄이 다가오는 것도 느끼어 보자.

이제 갈 시간이다.]

뭐 이런 방식의 묵념이다.


쓸데없는 잡초에게 너무 많은 자아를 투영했나 싶지만

묵념 끝엔 봄을 만끽하고 떠나가는 잡초가 대단해보이고, 부러워지기까지 했다.

논에 벼가 자라는 시간은 길어야 6개월이고

나머지 반년의 논두렁과 들판은 모두 잡초의 시간이다.

땅의 시간으로 보면 벼와 잡초 모두가 주인공인 것이다.


잡초의 죽음으로 시작하는 벼농사.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죽음으로 새 시작을 하는 것은 너무 뻔한 세계의 섭리니까.

잡초를 너무 안타까워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장하다 여겨주며 잘 보내주면 될 따름이다.


(때로 질긴 잡초들은 벼들 사이에서도 살아남아 꼿꼿하게 허리를 세우고 있다.

이번 제초는 제대로 되서 벼들 사이에서 피를 보지 않았으면,

아빠의 잔소리가 들려오지 않기를 바란다.)


잡초를 보내고 나면, 이제는 새로운 생명을 키워낼 자리를 마련해야 한다. 모판을 만들고 볍씨를 뿌리는 첫 걸음이 기다리고 있다.



-음력 3월 중순경. 제초를 하는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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