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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현 Feb 15. 2024

상태-정신, 마인드셋

plan에서 do로 가는 마인드셋. 심리적 safety net.

이 사고의 시작은 게임 분석이라는 점을 잊으면 안된다. 인생을 게임으로 본다. “인생 게임” 인생이란 게임에서 하이랭커로 가기 위한 분석. 그리고 인간의 스테이터스(능력창, 상태창)에서 높여야 하는 수치를 카테고리화 해서 나타낸 것이, 상태, 상황, 환경 그리고 그 속에 세부 사항 중에서 상태는 육체, 인내와 습관, 지식, 정신-마인드셋이 있다.


게임도 그렇듯이 현실도 실천없는 계획만으로는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저 탁상공론에 불과하다. 이 마인드셋은 모든 관점을 어찌됐든 부딪히고 깨지고, 행동할 수 있게, 행동과 시도, 도전에 대한 심리적 거부감을 낮추는데 목적이 있다.


심리적으로 도전에 대한 거부감을 낮춰서 계속해서 시도를 하게 한다. 그리고 종국에는 상황에서 까지 도전에 대한 거부감을 낮추는 가능하게 한다. 이것이 safety net이다.


생각뿐인 탁상공론에서 행동으로


“한다면 한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되든. 결과는 받아들이는 것, 우리가 바꿀 수 있는 것은 과정 뿐이다.” 이런 마인드셋으로 일단 바꿔야 한다. 우리는 보통 무언가 하기로 생각할 때 결과에 대해서 생각한다. 결과를 통해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과 결과를 통한 주변의 시선 같은 걸 말이다. 그리고 실패하거나 패배 했을때를 생각한다. 우리는 이 생각을 통해서 행동을 하지 못하게 된다.


우리는 나이를 먹으면서 학습한다. 성공한다는 건 그 어떤 일이라도 힘들다는 것을, 설령 그것이 인형뽑기라 할지라도. 반면에 실패는 너무나 쉽다. 인형을 뽑겠다고 선언하고, 인형뽑기에 도전하지 않는 것조차 실패로 여긴다. 그리고 인형 뽑기를 도전하면서 깨달은 모든 것들은 나에게만 남는 것이지, 주변에서 나는 인형뽑기에 실패한 사람이 될 뿐이다.


그러면 일단 주변에 말을 하지 않는 것도 좋은 생각일 것이다. 그냥 어차피 나와의 약속만 지키면 되니까. 심리적으로 주변의 비난을 버티지 못 하겠다면, 비난할 건덕지를 주지 않는 것이 현명한 방법이다. 또 그런 사람들과는 만나지 않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애초에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하고, 헐뜯고, 안된다고 말하는 사람은 자기자신의 인생에 크게 관심이 없는 사람일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관찰해보기: 변화의 속도


우리는 세상을 잘 관찰해 볼 필요가 있다. 세상이 변화하는 속도에 대해서도. 성경적인 이야기를 잠깐 해보겠다. 성경의 신, 전지전능한 주님께서 우주를 만드는 데도 신중하게 고심한 끝에 7일만에 이 세상을 만들었고, 그렇게 고심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을 만든 건 실수라고 생각해서 노아의 방주 에피소드를 통해서 인류를 한번 청소했다.


만약 우리가 신처럼 전지전능하다고 했을 때, 생각의 속도로 모든 것이 현실에서 일어난다고 한다면, 이미 지구와 우주는 이 세상에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의 죽음을 순식간에 상상할 정도로, 우리의 머릿 속은 이미 시간의 제약이 풀려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되돌릴 수도 없다.


무언가 일을 할때, 반드시 시간이 필요하다는 점은 그만큼 심사숙고할 수 있다는 점이 생긴다. 그리고 그만큼 어떤 일을 진행하게 된다는 것은, 분명한 숙고 끝에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다는 점이어야 한다.


시간과 숙고, 그 자제가 기회다. 실제로 할지 말지. 그래서 사기꾼들은 숙고하고 알아볼 시간을 뺏어가는 것이다. 시간을 빼앗고 함정으로 몰아넣는 것이 사기꾼들이 오랜 역사동안 써온 방식 중에 하나다.


행동하고, 실제로 현실에 실현시키기 전까지도 어마어마한 시간이 들어간다. 처음이라면 방법을 찾으면서 시행착오를 거칠 것이고, 능숙해져도 작업하는 시간은 반드시 필요하다. 이 점을 명심하고, 절대로 쉽게 포기하지 말고, 좌절하지 말자. 나도 할 수 있고, 너도 할 수 있다. 충분한 시간만 있다면

 

실패는 하나의 과정일 뿐이라고


실패는 결국 어떤 일을 성공하기 위해 필요한 과정 중에 하나라고 생각해야 옳다. 잘 생각해보자. 어차피 일어날 결함이었다면 모든 것이 다 온전하게 성공한 것 같을때 발생하면, 더 힘들지 않을까? 반면에 작고 자잘한 실패들이 쌓여서 온전하고 완전한 성공이라는 결과를 만들어낸다고 봐야한다.


만약 일론 머스크 로켓의 결함이 “성공했다고 착각한 후에” 현상으로 드러난다면, 만약 그 현상이 드러난 로켓에 사람이 타고 있었다면? 복구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소실이다. 그것은 더이상 일론 머스크 뿐만 아니라, 그 산업 자체가 일어설 수 없게 된다.


또 주짓수에는 “이기거나 배우거나”라는 말이 있다. 사실 나폴레옹이 한 말은 아니라고 하지만 “내 사전에 패배란 없다.”라는 말처럼, 긍정적인 프레임, 그리고 배워나가는 과정일 뿐이라는 프레임은 반드시 필요하다.


부정에서 긍정으로


우리가 시간이 흐른 후에 후회하는 것은 보통, 진실되게 말하건 데, 시도해서 실패하고 쪽팔렸던 게 아니다. 시도하지 않았던 것. 그렇게 가능성을 함께 묻어버린 것. 우리는 그런 것들을 후회한다. 사람은 평소에도 부정적인 생각을 하게 진화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긍정적으로 생각해줘야 한다. 모든 것을 그렇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도 안된다.


내가 여기서 주장하는 것은 “내 시도와 실험과 도전”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말이다. 천리길도 한 걸음부터고, 에디슨도 전구를 만들기 위해서 수천번을 실패했다. 그리고 일론 머스크는 자신의 인생을 걸고 로켓 발사에 매진했다.


어차피 한 번 살다가 죽을 인생이라는 점을 기억하자. 메멘토 모리라고 말하더라. 그리고 쪽팔리는 것이 가능성을 묻은채로 고통받는 것보다 훨씬 기분 좋은 일이라는 점을 명심하자.


작은 거 무시하지 마라, 사소한 선택은 없다.


사소하다.. 물론 사소한 것이 있을 수 있겠다. 하지만 이건 상대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지극히 상대적인 사소하다는 말을 자주 사용하면 이기적인 인간이 되고, 적을 만들게 된다. 지극히 상대적인 단어.. 그렇게 사소한 게 각자 다르다. 집중하는 게 다르기 때문이다. 이처럼 사람의 관점에서, 각자 다른 사정에서 사소한 것이 생길 뿐이지, 이 세상의 관점으로 볼 때, 사소한 것이 존재할까? 한 가지 예를 들어 보자면 우리 인간에게 사소해 보이는 해충 “모기”가 있다. 인간의 관점에서는 모기를 연구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누구나 사소하다고 생각하고 귀찮아 하며 잡을 것이다. 보일 때마다 잡아야 하는 번거로움 때문에 모기가 멸종하면 좋겠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생태계적으로 보면 모기의 멸종은 생태계의 혼돈을 야기한다.


이처럼 사실 사소한 것은 단 하나도 없다. 체스나 바둑 등의 기보가, 쉽게 말하면 역사가 생기는 모든 게임들은 그 하나하나의 사소해 보이는 수까지가 승패의 요소가 된다. “낙장불입”, “쏟은 물은 다시 담을 수 없다.”, “말조심해라.” 모두가 사실 사소한 것은 단 하나도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들은 없던 일로 할 수 없으며, 그 모든 일은 어떤 더 큰 일의 초석이 되기 때문이다. 이 점을 살린 게임의 전략이 바로 “스노우볼 전략“이고, 묻고 계속 가는 베팅법을 ”마틴 베팅“이라고 한다.


다시 주워담지 못 하니까. 무언가를 판단할 때, 최우선적으로 절대적인 것인지 상대적인 것인지부터 판단해라. 그리고 그것이 상대적인 것이라면(거의 모든 것이 상대적이지만), 말하지 말아라. 말하게 되더라도, 기분 상하지 않게 말하는 법을 찾아서, 생각해서 말해야 한다.


일에서도 사소한 것을 무시하면 안된다는 것은 “하인리히 법칙”에서 드러나고, 인간 관계에서는 데일 카네기의 “인간관계론”에서도 드러난다.


내가 생각하기에, 아주 오랫동안 강대국들 사이에서 살아남은 한국에 “겸손” 으뜸가는 미덕으로 살아남게 된 것은, 지리학적인 영향도 분명히 있겠지만, 사소해 보이는 것은 절대 사소하지 않으며, 경시하지 말라는 뜻이다. 그래서 나는 타인의 실수를 감싸주는데 “사소하다”는 말을 자주 쓴다. 자기의 실수를 크게 생각해서 괴로워 하는 사람에게 지나치며 말하기에 다정한 말 같다.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 / 허락 받지 않는 자.


나는 이 말이 만화 “베르세르크”에서 먼저 나온 것으로 알고 있다. 그것이 어찌되었든 이 말은 인생을 살아가는데 탁월하다. 그리고 반드시 마음에 세기고 있어야 하는 삶의 태도에 대한 진리 중에 하나다.


사실 인생을 잘 돌아보면, 우리 모두가 누구의 허락도 받지 않고 자유 앞에 던져진다. 그래서 누군가는 같은 알바를 하면서도 스스로 선택해서 하는데, 누군가는 환경탓, 세상탓 하며 어쩌다가 떠밀려왔다고 말한다. 자기가 왜 이런 일을 하고 있어냐 하냐며 소리친다.


요즘 인터넷에 “누칼협-누가 칼들고 협박했냐?(네가 하고 싶어서 한거 아니야?)”라는 말이 떠돈다. 나는 이 말을 좋아한다. 사실 이 개념은 철학에서도 오랜 역사를 자랑한다. 뭐 유사하게는 결정론과 자유의지부터, 직접적으로 같은 철학에는 “타뷸라 라사”가 있다. 인생은 비어있는 석판이며, 스스로 채워나간다는 것이다.


나는 군대 훈련소에서도, 자기가 왜 여길 와야 돼냐며 몇일을 그 소리를 하는 놈이 있었다. 그래도 그 놈은 학벌도 좋고 인성도 좋았기 때문에 말이 통했는데, “타뷸라 라사”라는 개념을 설명하면서, 여기에 오게 된 건 네가 선택한 거야. 너 나중에 군대가게 될 줄 몰랐어? 아니면 교도소를 선택하던가, 집도 잘 사는 놈이 해외에서 살던가 했어야지. 네가 선택 해놓고 왜 이제 와서 이렇게 불평이야. 라고 말했다. 그 동생은 별말 없이 수긍했다.


이런 말이 있다. 권리 위에서 잠든 자는 권리를 보장 받지 못한다. 즉 권리를 보장 받기 위해서는 가만히 있으면 안된다는 점이다. 계속 주장하고 활동해야 한다.


우리는 허락 받지 않는 자들이다. 자유 앞에, 세상에 던져진 자들. 카프카는 불안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불안의 자유의 현기증이다. 자유 앞에서 불안하고 자유를 어떻게 쓰고 누려야 하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노예 근성, 노예 도덕으로 누군가의 노예가 되려고 한다. 자유를 견디는 자들의 그늘에서 살아간다. 거기서 안정과 행복을 느낀다.


결국 모두가 자유롭게 태어나 누구의 허락도 받지 않아도 되지만, 자유의 현기증, 불안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은 강하게 버티는 사람들의 그늘 밑에서 살아가는 것을 “타뷸라 라사” 스스로 선택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탓, 환경탓 그만해라. 물론 영향은 있다. 그래서 왕으로 살 팔자가 거지 자식으로 태어나면 왕초가 된다고 하지 않던가? 뭐 그렇다고 요즘은 신분도 없고, 자본적 우열이 정말로 견고한 신분제 같다고 느껴진다면, 나는 아니라고 말하고 싶지만, 당신 혹시 불안한가?


자유로운 삶을 살면서 자기의 삶에 책임지고 죽는 것인 불안한가? 나는 자유롭지 못한 삶을 살면서 남이 시키는데로 살다가 죽을 수 있다는 것이 더 불안하다.


자유로운 자만이 “문장의 주인”이 될 수 있다.


나는 문장의 주인이라는 개념을 만들었는데, 예를 들자면 이렇다. 자. 당신은 대기업에 다니고 있다. 그런데 누군가가 다가온다. 누가 봐도 지저분하고 자기 생활을 규칙적으로 지키지도 못하는 거지다. 돈을 구걸하는데 그냥 지나간다. 뒤통수에 저주가 쏟아진다. 네가 직장에서 해고되게 만들겠어, 인간관계도 엉망으로 만들고 불행하게 만들거야!“라고 소리친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두려워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문장의 주인“이라는 개념을 알게 된다면, 두렵지 않을 것이다. 사실 이 개념은 이미 세상에 있는 말이다. 하지만 나는 단어로 만들어 본 것 뿐이다. 지키지도 못할 말 함부로 하지마라.라는 내용이다. 그리고 “남아일언중천금”이라는 말이다. 뱉은 말은 지키라는 것이다.


만약 위의 말을 당신에게 월급 주는 대기업 사장이 했다면? 나는 이게 더 무섭다.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사람의 말이 무서운 법이다. 왜냐하면 그 말, 문장은 실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게 바로 문장의 주인이다. 나는 이걸 마법사라고 생각한다. 마법사는 주문을 읊조리며 현실에 실현시킨다.


어떤 말이든 충분히 그럴 수 있는 힘이 생기기 전까지, 그리고 충분히 하고도 남을 행동만 말하자.


말에 대한 교훈은 성경에도 있다. 마태복음 15장 11절 말씀이다.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이처럼 감정적으로 말을 휘두르면 사람은 그 말을 다 지킬 수 없으므로, 말은 언제나 신중해야 한다. 말이 곧 행동이라고 생각해라.


유럽에서는 어휘력이 그 사람 사고방식의 한계를 결정한다거나, 일본에서는 언령이라고 말에는 신비한 힘이 깃들어있다는 식으로 언어, 글, 말과 관련해서 인간의 정신과 연결된 교훈이 세계 여기저기에 있다.


또 간디는 생각이 말이 되고, 행동이 된다.는 점을 말했고, 성경은 생각으로 죄짓는 것부터 막으려한다. 불교는 생각하지 말라고 한다. 그냥 그렇게 일어났구나. 초연하라고.


또 위에서 말했지만, 거의 모든 것이 상대적이므로 사소해 보이는 것을 사소하다고 말하지 말라. 상대의 실수로 지은 죄, 몰라서 지은 죄, 그리고 알아도 해버린 실수를 눈감아 주기 위해서 그의 선한 마음을 위해서 다정한 말을 건네자.


또 내가 나의 능력을 함부로 깎아내리고, 그렇게는 불가능하다는 말을 하지 말자. 왜냐하면 말은 상대적이어서, 그렇게 암만 말해도 세상에 적용되지 않는다. 세상 사람들 전부 쉽다고 느끼고 말할 때, 어렵다고 말한다면 당신에게만 어렵게 될 것이다.


30대부터는 하나만 하자.


30대부터는 하나만 파야한다. 20대는 말하지 않겠다. 20대에도 하나만 파도 될 수 있겠다. 하지만 나는 20대는 전반적인 상태를 올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주의다. 왜냐하면, 그렇게 공부하고 경험하고, 깨닫고 느껴야. 자기 자신의 가치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자기 자신, “인간의 도구화”를 막아야 한다는 생각이다.


스마트폰이 공장에서 대량 생산된다지만, 스스로의 가치도 모르는 도구기 때문에 판매자에 의해, 소비자에 의해 가격이 결정되서 시장에서 거래 된다. 만약에 스마트폰에게 인격이 있었다면, 자기 자신에 대한 통찰이 있다면, 절대로 자기 자신을 그 가격에 거래 하지 않을 것이다. 스마트폰은 인간에게 말할 것이다. 너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어? 너 사진, 동영상 찍을 수 있어? 너 인터넷 뱅킹, 유튜브, 아니 네가 나 없으면 할 수 있는게 뭐냐? 라고 하지만 스마트폰은 말을 하지 못한다. 우리는 말을 할 수 있는 인간이고, 인격이 있으면서도 자신의 가치를 알지 못하고 도구화 된다. 나는 그것을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무튼 말이 길었는데, 30대에는 도구와 같은 능력을 통해 삶을 해결하고 나아가야 한다. 그런데 자기 자신의 강력한 능력을 무엇을 위해서 사용할지 결정할 수 있게 성숙해지는 기간이 20대에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 뿐이지. 결국 강력한 도구 같은 능력을 갖춰야 하는 것은 사실이다.


때문에 20대에는 허송새월, 놀며 보내지만 않으면 나는 뭘해도 좋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30대에는 좋든 싫든 하나만 파라. 눈물이 나고, 피가 나도. 그게 내 결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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