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을 담은 빛깔은 조용히
햇살 무리 틈으로
구름의 온기 하나씩 따
억새꽃 세상으로
소복하게 나려 주다
무채색 벌판 사이
아롱진 눈물방울
은빛으로 피어나고
풀어진 상념으로
고고해진 자태
새하얗게 고개 든 사색만큼
질러대는 가을빛만 우수수
힘이 없으나
힘이 있다
송이송이 매달린
꽃술의 이름은
꾸밀 수 없는
그리움
억새는
그리움
가을의 정취가 물씬 풍긴다. 플라타너스 가로수길은 점점 노란색으로 변하기 시작하고 아이가 다니는 학교 앞 은행나무도 노랗게 물이 들어 운치를 더하기 시작했다. 가을만이 풍기는 인상은 하루하루가 매번 다른 얼굴로 변하여 소담스러운 공간을 내어 주고 있다. 황금빛 들녘에 익어가는 벼들의 장황한 이끌림은 지난 1년 간의 이야기를 품어 곱게 내려지는 풍경이다. 이중에서도 가을이면 뭐니 뭐니 해도 외로움의 대명사 바로 '억새'가 빠질 수 없다.
은은한 은빛 물결은 바람이 비어진 흩날림으로 수수하게 뿌려져 스산해진다. 이리저리 휘둘리는 듯하지만 사실 물결 따라 어루만진 빛깔은 우리가 모르던 단단함이다. 억새대의 가운데가 비어있는 까닭은 바람 따라 이리저리 유연해질 공간을 지켜주기 위해서이다. 공간의 미학이 남겨지고 보아 가는 가을은 진정 은빛이다. 단풍 진 빛깔만 가을이 아니다. 살며시 매달린 솜털 같은 꽃술들을 손으로 보듬어 쓸어내리면 까끌한 마디마디 부드러운 인상이 '콕' 박힌다.
십 대 시절 억새꽃을 한 아름 따다가 여러 가지 색깔로 물감옷을 물들인 기억이 난다. 가을 내내 방 한쪽 운치를 더한 풍경이 고스란히 기억 안에 머문다. 방 안에 놓인 억새꽃은 바르면서 꼿꼿하게 그 자리를 지킨다. 계절마다 비친 가을은 어김없이 내 방 안에 놓였다. 다음 가을이 오기까지 단단히 거머쥔 뿌리는 내일을 향한 기약이다. 그 약속은 여전히 변함없이 벌판을 흔든다. 바람이 머문 자리만큼 은빛은 반짝거린다. 참으로 곱고 단단해질 빛깔이다. 가을로 흘러가는 동안 억새의 이야기만큼 소란스럽지 않게 운치 있는 나날을 맞이하고 싶다.
이 가을이 지나 또 다른 가을이 오기까지
억새처럼 단단해질 이야기를 텅 빈 가슴만큼
진실되게 품어가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