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홍춘욱 Dec 25. 2022

대한민국 만들기7 - 장면 정부는 왜 버림 받았나?

소심하고 무능한 장면 내각에 대한 케네디 정부의 실망감 ↑

최근 흥미롭게 읽은 책, "대한민국 만들기 1945-1987"에 대한 7 번째 서평입니다. 6편에 걸쳐, 이승만 정부가 어떤 과정을 거쳐 무너졌는지 알 수 있었죠. 이번에는 미국이 본 장면 정부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혹시 지난 번 서평을 못 본분들은 아래 링크를 클릭하시기 바랍니다. 


대한민국 만들기 1945-1987:이승만 외의 대안은?

대한민국 만들기2 - 이승만 정부와 농지개혁

대한민국 만들기3 - 전쟁 이후 이승만 독재 강화

대한민국 만들기4 - 전쟁 이후 경제정책 실수들

대한민국 만들기5 - 이승만 독재가 무너진 이유는?

대한민국 만들기6 - 이승만 정부 말 불황의 원인은?


***


1960년 3.15 부정선거에 반발해 일어난 대규모 시위 속에 이승만 정부는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4.19 혁명을 계기로 집권한 장면 정부는 참으로 무능했습니다(186쪽).


장면 정부는 한국 사회의 안정을 유지하는 데 실패하였다. 특히 사회 전반의 공공질서를 유지하는 것이 큰 과제였다. 이승만 정권이 정치적 탄압의 도구로 사용하던 경찰 조직이 4·19 혁명 이후 큰 혼란에 빠져 제대로 기능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일제 식민 경찰에서 복무한 경력을 가지고 있던 많은 사람들이 1960년까지 한국 경찰의 요직을 차지하였는데, 4·19 혁명을 계기로 대부분 조직에서 추방되거나 가혹한 처벌을 받았다.

이처럼 경찰이 제대로 활약을 할 수 없게 되자 사회 전반에서 범죄율이 치솟았고 사회가 혼란한 틈을 타서 깡패와 조직폭력배가 늘어났다. 그러나 장면 정부는 이러한 사회불안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할 수 있는 공권력을 행사하지 못했다. 한편 1960년 말과 1961년 초에 걸쳐서 다양한 정치적, 사회적 이슈를 둘러싼 찬성 또는 반대 데모와 시위가 잇달았다. 그중에는 북한과 한국의 직접 대화를 주장하는 학생과 이에 반대하는 보수 단체의 시위가 동시에 벌어진 일도 있었다. 


특히 일부 좌파 세력이 북한과의 직접적 대화를 추진하고 또 통일을 주장한 것은 미국과 우파 세력을 긴장시키는 계기로 작용했습니다. 


***


북한의 남침으로 수 백 만에 이르는 목숨이 희생된 상황에서, 게다가 전쟁의 주범이 멀쩡하게 집권하고 있는 북한과의 대화를 주장한 것에 대해서는 '시기상조'라는 말 밖에 할말이 없는 것 같습니다. 더 나아가 국민들은 삶의 안전이 확보되지 않는다고 느끼게 되었고, 이는 지지율의 급격한 하락으로 이어졌습니다(188쪽).


장면이 정권을 장악한 지 몇달 후에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3.7퍼센트만이 장면을 지지하였으며, 51.5퍼센트는 대체로 "관망한다"고 응답할 정도였다. 

장면은 정권을 장악한 이후 시급한 사회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강력한리더십을 보여주지 못했다. 특히 사회의 치안이 더욱 불안한 상황으로전개되었으나 정부가 공권력을 이용하여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 않음으로써 미국 독립전쟁 당시 제임스 매디슨이 연방주의자 논고<Federalist Papers〉에서 지적했던 기본적인 진리, 즉 "좋은 정부는 먼저 국민을 제대로 통치해야 하며, 그러고 나서 정부 자신을 통제해야 한다”는 진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물론 장면 정부 초기에는 미국도 강력한 지지를 표시했죠(189쪽).


4·19 혁명 직후 미국 국무부는 이 사건을 통해서 한국에 민주주의가정착할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이 열렸다며 환영하는 분위기였다. 더글러스 딜런Douglas Dillon 국무차관은 “(이 사건을 통해서) 한국이 전 세계로부터 인정을 받게 될 것이며, 또한 미국이 싸워서 지켜낸 한국이 민주주의 원칙에 따라 발전할 수 있기를 기대" 한다고 밝혔다. 미국 정부는4·19 혁명이 낳은 한국의 민주주의가 더욱 발전할 수 있도록 격려하였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1960년 6월 한국을 방문하여 국회에서 연설하고 민주당 지도부를 접견하였다. 장면 정권이 수립된 직후에 이루어진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한국 방문은 새로운 정부에 대한 미국의 지지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장면 정부가 여러 면에서 기대에 못 미친다는 점이 확연해지자, 분위기가 바뀌었습니다(189~190쪽).


미국의 정책 결정자들은 북한의 침략 위협이 줄어든 상황에서 한국의 정치 지도자가 국가 경제를 재건하는 데 전력을 기울일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장면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자 그에게국가 지도자로서의 능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미국 정부는 그의 민주적 성향이나 미국과 협조하여 문제를 해결하려는 태도는 높이 평가했지만, 경제개발을 위해서 반드시 해결해야 할 부정부패나 정치적 분열과같은 '고질적인' 문제들을 해결하지 못하는 것에 실망을 금치 못했다. 장면에 대한 비판적인 평가는 1961년 1월에 케네디 행정부가 들어서면서더욱 명확해졌다.(중략)

이미 1960년의 7월 선거 직전에 보낸 전보문에서 크리스천 허터Christian Herter 국무장관은 장면에 대해 “개인의 정직, 세계정세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 등을 따져봤을 때 대통령에 적합한 인물"이라고 생각되며, 다만 강력한 권한을 행사할 총리에 적합한 인물은 "좀 더 젊고 정열적이며 정치력과 행정력을 겸비한 인물"이었으면 좋겠다고 희망하였다. 주한 미국 대사 월터 맥카너기 Walter McConaughy도 허터 국무장관의 의견에 동의하였으나 “장면을 제외하면 현재 한국 정치인 중에 경험, 연령 등 모든 면에서 총리직을 수행할 만한 인물은 찾기 힘들다”고 보고하였다. 맥카너기 대사는 정치적 리더십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장면은 적임자가 아니며 “한국 정부는 개인보다는 젊고 유망한 지도자 집단이나 조직에 의존하게 될 것이다"라고 예상하였다. 따라서 미국 정부는 새로운 정치 지도자가 성장할 수 있도록 격려하고 자극해야 하며, "한국 사회에 올바른 정치 · 경제를 정착시키고 발전시키려는 야망을 가진 젊은 시민과 정부 각료들을 지원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


사실 정확한 평가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5.16 쿠데타 때 장면 총리가 단호한 태도를 보였다면, 사태가 그렇게 진행되지 않았을테니 말입니다. 쿠데타 당시 장면 총리는 38시간 동안 수녀원에 도피한 상태였죠. 장면이 몸을 숨기고 아무일도 하지 않는 시간에, 전두환이 육사생도를 이끌고 쿠데타 지지 시위를 하는 등 '성공'이 확실해지고 말았습니다. 아무튼 이 징후를 미국도 이미 눈치 채고 있었습니다(190~191쪽).


장면이 총리직을 수행한 지 몇 달이 지난 후에도 미국 정부는 그가 이끄는 새로운 행정부가 과연 사회 및 경제 개혁과 같은 긴급한 사안을 해결할 수 있을지를 우려하였다. 장면이 총리에 취임한 지 한 달 후인 1960년 8월에 그레이엄 파슨스J. Graham Parsons 국무부 차관보는 장문의 전보문을 통해서 "아직까지 한국에는 국민 전체가 믿고 따를 수 있는 국가적 이상과 목표, 정책을 상상력과 비전, 에너지를 가지고 제시할 만한 지도자나 집단을 발견할 수 없다. 강력한 지도자가 국가적 이상과 정책을 제시해야만 한국 사회의 정신적, 사회적 혼란이 끝날 것이며 한국이 가지고 있는 사회적 불만이나 문제에 내재한 심리적 어려움을 개선하여 국가 전체에 정신적 일체감을 심어줄 수 있을 것이다"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이러한 사회적 변화를 자극할 수 있는 강력한 지도자가 없는 상황에서 "국가의 복지를 증진하는 데 필요한 필수 절차인 경제적, 기술적 진보는사실상 불가능하다"라고 예측하였다.

장면이 정권 내부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고전하고 한국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는 데도 어려움을 겪자 미국 정부는 비관적인 전망을 내놓기시작했다. 즉 장면의 리더십이 한국 사회의 암울한 문화적 환경에 둘러싸여 있어서 무기력함을 극복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1960년 12월 맥카너기 대사는 장면이 "의회주의 전통의 부족과 정치인의 기회주의적 반대” 때문에 "점차 가문이나 지역 연대와 같은 전통적인 가치로 회귀하고 있다"고 평가하였다. 장면 정권이 이룬 몇 가지 성과에도 불구하고, 과연 그가 한국 사회에 절실하게 필요한 경제 성장을 이뤄낼 수있을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회의적이었다.

장면의 무능력과 무경험에 대한 비판은 케네디 행정부가 들어서면서더욱 거세졌다. 근대화 이론은 후진국이 경제적으로 빈곤한 이유를 잘못된 문화적 전통에서 찾는데, 그 영향을 받은 케네디 행정부는 장면 정부가 겉으로 보기에도 지나치게 "구식이며 전통에 집착한다고 평가하였다. 케네디 행정부의 일부 보고서는 장면 행정부의 인사 정책에서 드러난 문제점을 지적하며 한국 정부가 "정직하고 청렴한 젊은 관료를 외면한 것에 실망을 표시하였다. 또한 “동양적 가족제도나 전통적인 장유유서와 같은 관념 때문에" 장면 행정부 내에서는 유능하고 장래가 촉망되는 인재들이 중용되기 어렵다고 평가하였다. 이 보고서가 장면 정부가 무능력한 원인을 한국의 문화와 전통의 영향으로 지적한 데에는 지나친 면이 없지 않지만, 장면 정부의 인사 정책에 대한 평가는 정확했다. 


물론 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 세력을 칭송하려는 것은 아닙니다만, 적어도 아옌데 전(前) 칠레 대통령처럼 단호하게 맞섰다면 사태는 전혀 다르게 흘러갈 여지고 있었음을 지적할 뿐입니다. 다음 시간 5.16 쿠데타 때의 미국 이야기를 들으면 더 사태가 분명해지겠죠. 


작가의 이전글 해방 이후 한국의 금융정책 - 최강의 권력자, 이승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