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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춘욱 Dec 25. 2022

대한민국 만들기8 - 516에 대한 미국의 입장은?

미국, 처음에는 쿠데타에 맞서다.. 태도 바꿔

최근 흥미롭게 읽은 책, "대한민국 만들기 1945-1987"에 대한 8번째 서평입니다. 1~6편에서는 이승만 정부가 어떤 과정을 거쳐 무너졌는지 살펴 본 데 이어, 7편에서는 장면 정부의 삽질을 살펴보았습니다. 8편에서는 드디어 516 쿠데타를 다룹니다. 혹시 지난 번 서평을 못 본분들은 아래 링크를 클릭하시기 바랍니다. 


대한민국 만들기 1945-1987:이승만 외의 대안은?

대한민국 만들기2 - 이승만 정부와 농지개혁

대한민국 만들기3 - 전쟁 이후 이승만 독재 강화

대한민국 만들기4 - 전쟁 이후 경제정책 실수들

대한민국 만들기5 - 이승만 독재가 무너진 이유는?

대한민국 만들기6 - 이승만 정부 말 불황의 원인은?

대한민국 만들기7 - 장면 정부는 왜 버림 받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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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야 역사를 돌이켜 보는 입장에서 516 쿠데타가 성공한 것을 알고 있습니다만, 1961년 당시에 이를 정확하게 예상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다만 미국은 이미 1961년 3월에 상당한 위험 징후를 포착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192쪽).


미국 정부는 유약한 장면 정권이 초래하는 불안정한 상황으로 인해서 한국에서 미국의 지위가 손상되지 않을까 우려하였다. 따라서 미국 관료들은 장면 행정부는 물론이고 통제가 불가능할 정도로 과격한 시위를 주도하는 과격 단체에 대해서도 관심의 수위를 높였다. 특히 항간에서 떠돌고 있던 소문, 즉 조만간에 폭동과 내란이 일어날 것이라는 소문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미국 정부의 내부 보고는 “위험할 정도로 악화된" 한국상황을 지적하며 “한국 정부가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서 필요한 조치를 취하지 못할 정도로 무기력해졌다"고 평가하였다. 또한 “장차 혁명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다분한 반정부 시위는 반미 성향을 띠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작성된 1961년 3월의 정보 보고는 “계획적, 우발적, 혹은 여러 가지가 뒤섞인 상황에 의해서 한국의 주요 도시에서 시위와 데모가 일어날 것이며, 시위대는 파괴적인 폭도로 발전하여 국가를 위기 상황으로 몰고 갈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하였다. 이 보고서는 “3월 아니면 4월에 어떠한 형태로든 대규모 사건이 발생할 것이라고 예측하였다. 1961년 봄에 이러한 "폭발이 실제로 발생할 것이라는 예측을 무시하는 사람도 많았지만, 이 보고서는 당시 한국이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상황에서 “내부의 위기 혹은 위기에 대한 위협이 앞으로 몇 년 사이에 선명히 드러날 것이다"라고 지적하였다. 이와 같은 우려에도 불구하고 케네디 행정부의 각료들은 미국 정부와 긴밀하게 협조 관계를 유지했으며 특히 민주적 절차에 따라 선출된 장면 정부를 버려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다만 장면보다 장래성이 밝은 대안이 생긴다면 굳이 장면을 고집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이승만 때도 그렇지만, 미국은 한국의 상황에 별 관심이 없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북한을 막는 '공산주의의 방파제' 역할이 중요하지, 한국의 경제발전과 안정 등에 대해서는 사실 손을 놓은 상태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즉 넘치도록 원조 물자를 제공하기는 하지만, 한국 일에 엮이기 싫어하는 분위기가 진하게 느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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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516 쿠데타는 피를 흘리지 않고 진행되었습니다. 앞에서 살펴본 대로 장면 총리는 수녀원으로 도망했고, 윤보선 대통령은 쿠데타를 지지했으니 말입니다(198쪽).


국가재건최고회의가 이와 같이 극단적인 조치(1만 3천 명의 불량배 구속 및 야간 통행금지 등)를 강행했음에도 불구하고 국민의 반응이 그리 나쁘지만은 않았다. 그동안 한국 국민은 장면 정부가 국가 전체에 만연한 정치, 경제적 불안정을 해결하지 못하는 것을보면서 실망하고 있었다. 그런데 국가재건최고회의가 등장하여 신속하게 폭력배를 근절시키자 국민들은 찬사를 보낸 것이다. 또한 박정희가집권 초기부터 부정부패의 근절을 강조하자, 정치인들이 국민의 생활고를 아랑곳하지 않고 호화로운 생활을 하는 것에 염증을 느끼던 국민들은 지지를 보냈다.

더불어 중도 좌파적 시각을 견지하였던 지식인과 학생도 군사 정변을 지지하였다. 쿠데타를 주도한 세력이 군 장교라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한국 사회는물론이고 미국에서도 이들을 지지하고 나섰다. 군사 정변을 이끈 지도자는 군대만으로도 광범위한 변화와 개혁을 추진할 수 있다고 확신하였다.


물론 이 세력이 이승만보다 더 심하게 해먹는 부패 집단이 될 것이라는 것을 싫도록 경험하게 됩니다. 참고로 김종필 등이 주도한 이른바 '4대 의혹 사건'에 대해서는 "시장의 기억2 - 1962년 증권 파동 이야기"을 클릭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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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튼 역사 공부하다보면 '정의'니 '부패청산' 같은 이야기를 하는 집단이 가장 부패의 늪에 빠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쿠데타를 일으킨 이유가 '나도 해먹겠다'는 강한 질투심에서 시작되었기에.. 이런 슬로건을 내걸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아래 기사는 쿠데타 후배들(전두환 등)이 김종필과 이후락, 박종규 등 박정희 정부의 고관을 부정축재자로 몰아 어마어마한 자산을 몰수한 것을 보도하고 있습니다. 현재 물가로 환산하면, 김종필씨가 몰수당한 돈 216억원은 대략 1,359억원에 이릅니다. 참고로 전두환씨는 2021년 죽기 전까지 24년 동안 956억원의 추징금을 안내고 버틴바 있으니, 김종필씨가 이긴 것 같기는 합니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1539344#ho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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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케네디 정부는 쿠데타를 지지하지 않았습니다. 일단 박정희의 좌파 전력을 잘 알고 있는데다, 민주 혁명을 통해 집권한 장면 내각이 무너진 이후 심각한 혼란이 발생할 것이라 걱정했기 때문입니다(201~202쪽).


5월 16일에 군사 정변이 발생하자 미국 정부의 각료들은 이 상황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를 놓고 고심하였다. 한국에서 쿠데타가 발생한 순간, 미국 국무부는 일시적으로 마비된 상태였다. 새뮤얼 버거 Samuel Berger 신임 주한 미국 대사가 5월 16일까지 서울에 도착하지 못했기 때문에 마셜 그린 Marshall Green 대사 직무대리가 주한 미국 대사관의 모든 업무를 책임지고 있었다. 군사 쿠데타가 발생한 시점에 케네디 대통령과 딘 러스크 국무장관은 캐나다를 방문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의 상황을 잘 모르는 체스터 볼스Chester Bowles가 국무부를 지휘하고 있었다. 따라서 한국의 군사 쿠데타에 대한 케네디 행정부의 반응속도와 판단에는 여러 가지 제한이 있었다. 

그런 와중에 주한 미군 지휘관과 주한 미국 대사관은 쿠데타 세력에 대해서 불쾌감을 표시하며 이들을 제압하고 장면 정부를 복원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쿠데타가 일어난 지 몇 시간 후에 주한 미군 사령관 매그루더 장군은 "장면 총리가 이끄는 한국의 정통성 있는 정부를 지지하기 위해서 한국군을 포함하여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모든 부대를 소집하였다. 그는 "한국 육군참모총장을 포함한 모든 지휘관이 자신의 권한을 이용하여 혁명에 가담한 부대를 통제하고 이후 즉시 정부가 통제권을 행사하며, 이를 통해서 한국군 내부 질서가 정리될 것이다"라고 기대하였다. 주한 미국 대사관의 마셜 그린 대사 직무대리도 미국 정부는 매그루더 주한미군 사령관의 의견에 동의한다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그러나 혁명 세력은 이들의 성명서가 신문이나 방송을 통해서 발표되는 것을 통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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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매그루더 사령관이나 마셜 그린 대사 직무대리의 결정은 혁명 세력에게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습니다. 왜나하면 미국 국무부와 국방부가 이들을 공식적으로 지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202쪽).


국무부는 처음에 마셜 그린의 의견에 동의하였으나 공식적으로 이 사건에 대해서 분명한 입장을 밝히기보다는 일단 "관망하는 태도"를 취하기로 결정하였다. 케네디 행정부가 한국의 새로운 지도자에 대해서 최초에 취했던 "관망하는 태도"는 점차 혁명정부를 수용하는 방향으로 바뀌었다. 쿠데타 발생 2주 후에 작성된 미국의 정보 보고서는 군사 정변을 이끈 지도자가 "한국 정부의 경제와 행정 업무에 새로운 힘과 규율을 제시할 것"이라고 예상하였으며, 한국 사회의 고질적인 "부정부패 근절"에도 성공을 거둘 것이라고 예측하였다.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윤보선이나 장면 같은 2공화국의 핵심 정치인들이 쿠데타에 대해 단호한 반대 입장 혹은 저지를 위해 노력하지 않은 데 있습니다만, 케네디 정부가 보기에 쿠데타 세력이 꽤 맘에 드는 구석이 있었기 때문도 영향을 미쳤습니다(202~203)


이 보고서는 혁명 지도자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예측하였다. 

"이들은 미국이 그동안 접촉했던 한국의 민간 관료, 정치인, 고위 장성과는 전혀 성향이 다른 새로운 인물이다. 권위주의적이고 민족주의적인 성향으로 볼 때, 이들은 미국의 영향이나 간섭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강인하고 정직하여 다루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물론 이들은 한국이 미국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미국과 관계를 유지하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이들은 한미 관계에서 한국의 군사, 경제, 정치 사안에 대한 자율성을 요구할 것이다. 그중에서도 한국과 유엔군의 군사 지휘 관계, 즉 유엔군이 한국군을 통제하고 있는 현재의 군사 안보 체제는 골칫거리가 될 것이다."

https://www.hani.co.kr/arti/politics/diplomacy/77405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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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정확한 판단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겉으로는 민족주의적인 척 하면서 '한일수교'를 강행하고, 또 베트남으로 파병해 돈을 벌어들이는 등 현실주의적인 행태를 보였으니 말입니다. 

https://history.state.gov/historicaldocuments/frus1961-63v22/d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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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케네디 정부는 박정희 정부를 꽤 신뢰하게 되고, 아예 11월에는 미국으로 초청해 정상회담을 개최하기에 이릅니다(203쪽).


박정희가 군사 정변 이후 점차 정권을 강화함에 따라 미국 정부는 그를 한국의 발전과 근대화를 추진할 수 있는 인물로 인식하게 되었다. 상황이 이렇게 전개되다 보니 미국 정부는 박정희의 민족주의적, 권위주의적 성향에 대한 걱정을 무시하게 되었다. 신임 주한 미국 대사 새뮤얼 버거도 박정희의 정책을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다. 1961년 10월에 작성하여 국무장관에게 보낸 보고서에서 버거 대사는 한국의 군사정부가 "정권 자체의 대중적 이미지를 손상하는 권위적, 군사적 특징을 일부 가지고 있지만, 이들의 열정, 에너지, 진지함, 상상력은 대단하다"라고 적었다. 또한 박정희가 “위로부터의 진정한 혁명을 시작해서 한국 사회의 근본을 바꾸려는 광범위한 개혁을 추진하고 있다"고 평가하였다. 


1961년 미국을 방문한 박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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