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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나네 Sep 01. 2022

그리고 하늘을 봐



 갇히는 건 감감하다.


내 인생만 돌아봐도 그렇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어른들은 나에게 입단속을 시켰다. "어디 가서 엄마가 없다고 말하지 마라."

1970년도에 10살이 채 안된 아이는 왜냐고 반문도 못하고 그 계율을 지키느라 고 아득하게 살다.



돌이켜보니 엄마 돌아가셨다는 말을 참던 어린  가락 오므 살았다. 마음 움츠리니 손가락이 마음을 따라가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서 손가락을 감추고 있었다. 가락을 남 앞에 펴 보이는 게 다. 내 손이 너무 큰 것 같고, 누렇고 너무 못 생긴 것만 같았다. 을 주어 꼭 쥔 손가락이 어떤 땐 아팠다. 손이 싫었다. 너무 세게 부린 날 손톱자국이 손바닥에 판화처럼 남기도 했다. 른이 되고도 그 현상은 꽤 오래 더 지속됐다.



마음에도
트라우마가 돋았을 거다.




엄마가 살아 계실 땐 엄마가 아파서 병상에 누워있었을지라도, 하기 싫은 심부름을 시켰을지라도, 마음은 포근하고 따스했었다. 동네 장이던 아버지로 인해 우리 집 사랑방은 마을 사람들이 모이는  방이었다. 구나  당시 우리 마을에서 일본 말을 통역할 수 있는 사람은 엄마와 아버지가 유일하여서 우리 집 사랑방은 더 힙한 장소가 되기도 했다.

엄마가  안방에 계실 때 사람들은 최소 한 번씩은 나의 머리를 쓰다듬었, 친절한 웃음을 내 으로 가득 넣어주곤 했었다. 그건 듯한 사랑이었기를 북돋우칭찬이었다.

엄마가 가신 후로는 세상으로부터 냉기가 흘러들었다. 차가운 세상 속에서 나는 엄마가 돌아가신 진실을 영문도 모르고 부로 발설치 다.



엄마가 암투병을 하실 때 병원비무당 비( 그 당시는 굿을 하였다.) 충당하느라 우리 땅은 남의 땅으로 넘어가면서 가세가 기울었다. 국민학교 때 똘똘하던 난 1년 집에서 은 후에 들어갔다. 이듬해 여중을 들어가 보니 나와 같은 반이 친구 A, B2학년 배지를 달고 있었다. 나는 그 아이들을 피해 다녔다. 숨길 일이 하나 더 생겼다. 엄마가 안 돌아가셨고, 중학교를 1년  안 꿀었고. 

일종의 환지통 같은 거였다. 나의 양심은 뭔가 불안하였다. 



영문 모르고 입을 닫는 건,
새장 안에서 날개를 접은 새와 같다.



물 한 모금 마시면서도 세상 눈치를  살펴야 한다.




내 나이 27세에 푸근한 남자와 결혼을 하였다.




난 이 세상에서 내 남편만큼 푸근한 남자는 없다고 느다. 나의 모든 것을 품어주고 막아주고 이해하여 주었었다. 무엇보다, 누구보다 건장한 청었다.

그런 그가 한순간에 농기 사고로 그토록 멀고 멀다는 레테의 강을 건너리라고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다. 그가 남긴 막내는 두 살배기 아들, 나의 영원한 사랑 나의 아들이기도 한, 민구였다. 그리고 사랑하는 두 딸들은 다섯 살, 여덟 살이었다.



가 떠난 날부터 난 자발적으로 남편이 없는 사실을 숨기고 살았다. 그 현실은 너무나 현실적이었기에 타인 물론, 한순간에 가장이 된 나 자신에게까지 숨기고 살아야 했다. 숨기는 힘으로 나는 내 삶을 지탱하였다.

그가 농사짓던 큰 과수원을 이어받아 8년간을 농사지으면서  막막할 땐 하늘의 그에게 길을 묻곤 했었다. 그럴 때마다 살아생전 지극히 친절하고 누구보다 성실했던 그의 음성을 듣곤 했다.  8년 동안 과수원을 떠나지 못했다. 남편 피땀으로 일구어서 보배 같이 여기던 2천 여 그루의 배나무를 선뜻 버리지 못했다.

아이들 교육을 위해 도회지로 나와 글쓰기와 독서 지도를 할 때, 사람들에게 남편이 없다는 걸 숨겼다.



불혹이 가까운 나이에 내가 그토록 갈망했던 국문과 대학원 졸업 글을 면서 비로소, 허심탄회하게 나의 글에게  털어놓았다.  나의 비밀들을 글로 쏟아놓았다. 새가 새장 밖을 날아가니 숨통이 트였다. 즉에 그럴걸. 내가 죄지은 인생도 아니었는데, 나의 운명이 나를 끌고 갔는데, 엄마 없고, 중학교를 1년 꿀었고, 남편 없고, 그게 뭐 그리 대수라고 꽁꽁 숨기고 다녔을까.

그건 자존심이었을까. 방어였을까. 뭐였을까. 지만 난 심리학은 모른다.


생을 더듬어 스스로 질문해 본다.



만약 내가 그때 음부터  대신 참말 했다면 내 생은 어떻게 변했을까. 한 편으로는 그건 하얀 숨김었다. 마을 어른들 사랑까지 독차지하다가 어느 날 문득 엄마가 돌아가셨으니, 하고 많은 사람들 중 나를 라보는 시선들이 평소와 똑같지는 않았을 것이다. 물론 대부분의 일가친척들이 른의 으로 대해지만, 엄마가 돌아가시고 마을 사람 중 몇몇 어른은 내게 어른답지 못했음을 나는 .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생을 엄마가 돌아가신 때부터 다시 살아보라고 한다면 - 절대로 돌아가고 싶진 않지만 - 난 엄마가 이 세상에 안 계심에도 계신 척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 대신 더 단단한 마음으로 살아갈 거다. 더 당당하고, 담대하게 누가 뭐라든 흔들리지 않고 내 길을 가면서 꿋꿋하게 참말을 하고 살 테다.  자랑할 일도 아니지만, 지나치게 숨겨야 할 일도 아니다.


첫 단추는 중요하다.



어려서 이유도 모른 채 하찮은  시작 숨김을 메꾸려고 쪼잔한  끼를 치는 건, 늘 뒤 안 닦은 것 같은 찝찝한 인생 된다. 을 항상 움츠리고 산다는 건, 불행을 축축한 그늘 속에 가둬두는 것과 같다. 그래서일까. 마음을 펴지 못하였으니 한때 어둠 속이 편하기도 했다. 그러나 다시 돌아가 산다면 난, 맨 먼저 나 자신과 이렇게 다. 너의 운명 햇빛 속에 꺼내놓고 손바닥을 들어   봐.




그리고  하늘을
 보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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