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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릭스 leex Feb 16. 2024

희망퇴직 위로금 1억을 받았습니다

Trust _메시지_ 3. 행동성

장 대리는 봄이 시작된 3월 초 사직서를 냈다.

"당분간 다 잊고 쉴 거야. 어디든 발길 닿는 대로 가보려고..."

"대리님..."

"꽤 했어. 졸업 전에 입사해서 쉬지도 않고 9년간 달렸으니 좀 쉬어가도 되지 않겠어?"

"연락...드릴게요."

"알아서 잘하겠지만... 무엇보다 너 자신을 잃어버리지 마. 윗사람, 회사, 이런데 맞추다 보면 나를 낮추고 깎고 억누르고 그러다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내가 아니게 돼버리거든. 나 이런 사람이야. 그 정체성만은 잃지 마라..."


장 대리는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한 후 쿨 하게 되돌아섰다. 9년간 일했다는 사람의 손에 들린 건 쇼핑백 하나가 전부였다. 더할 나위 없이 경쾌한 보폭으로 멀어져 가는 그 뒷모습을 태백은 한참이나 바라보며 서 있었다.


4월, 성수동에도 벚꽃이 폈다.

'프로젝트 R'의 강의장을 일부러 이곳에 대관했다. 대관을 포함한 실행 품의를 올렸을 때 팀장의 표정은 구겨졌다. 태백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이게 뭐냐는 듯 말이 없었다. 태백은 꼿꼿이 서서 당위성을 설명했다.


"예를 다하게 해 주십시오."

"비용이 이게..."

"대 T그룹이 비용 문제 때문에 머뭇거리는 일이 있었습니까?"

태백은 T사람 김 팀장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MZ 시절에 비하면 절반 수준도 안됩니다. 우리 이제 선진 T옷으로 갈아입어야 한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김 팀장은 똥 씹는 표정으로 마지못해 승인했다. 상무에게도 한 소리 들은 모양이었으나 개의치 않았다. 조건이 붙었다.

"본사  프로 항상 배석하도록 해..."

뱀의 얼굴 같은  프로를 떠올리자 으스스 한기가 돌았다.


"야~여기 좋네~"

"박 기장님 잘 지내셨어요?"

"칙칙한 강의장에 모이라고 할 줄 알았더니만..."

"여 오랜만~"

"김 기사님 오랜만에 뵙네요..."


9시 시작을 앞두고 교육생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총 39명, 주로 영업, 물류, 생산공정에 근무하는 10년 차 이상의 40대 초반에서 50대 중후반 베테랑 들이었다. 드물긴 하지만 30대 대리급도 몇 끼어있었다. R리스트에 오른 이들은 맑은 봄날 오전처럼 첫인사를 주고받았지만 서로의 면면을 확인한 후 이내 어색한 침묵으로 돌아섰다. 꽃 피는 젊음의 거리 성수동이 아니었다면 침잠(沈潛)의 무게를 감당할 수 없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정각 9시 첫 세션이 시작됐다. 교육 취지와 이후의 계획을 설명하는 오리엔테이션은 태백이 맡았다. 일반적인 워크숍이나 교육에서 오프닝을 도맡았던 상무, 팀장도 눈에 띄지 않았다. 강의장 세팅을 돕는 인사팀 인턴사원 J가 함께할 뿐이었다.


0에 가까웠던 예산을 최대치로 확보해 양질의 교육 커리큘럼을 구성하려 했지만, 팀장은 아니 회사는 다시 한번 '프로젝트 R'의 취지를 못 박았다. 애초에 발을 담그지 않았다면 모를까 그 본질을 알고도 맡게 된 이상 혼자만의 고집을 부릴 수도 없었다. 언제 왔는지 본사 프로가 강의장 뒤편 벽에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태백은 눈인사로 갈음하고 곧장 오리엔테이션을 시작했다.


이틀간의 커리큘럼 중 본사에서 강제로 배정한 '은퇴 후 제2의 인생 설계' 4시간짜리 세션은 노골적인 회사의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태백이 확보한 예산의 8할을 투자해 초빙한 유명 동기부여 강사의 '긍정의 힘' 세션을 제외하면 이렇다 할 외부 프로그램도 없다. 다수의 시간이 '토론'으로 채워졌다. 이틀간의 교육이 종료되면 이곳에 모인 39명은 본사 지하에 마련된 별도의 공간에 대기발령 될 터였다. 인사팀 김에 의하면 재고와 각종 도구들을 보관하던 창고를 비워두었다고 했다.


"솔직히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고민이 많았습니다...뻔히 보이는 수식어를 갖다 붙이고 싶지도 않았고요..."

태백은 잠시간의 침묵 끝에 어렵게 첫마디를 뱉었다.

"아 잠깐, 모 매니저님 제가 한 마디 할 시간을 주시겠어요?"

뱀의 얼굴을 한 프로가 끼어들었다. 태백은 내키지 않았지만 고개를 끄덕여  프로를 단상 앞으로 맞았다. 오 프로는 교육생들 앞에서서 오른손을 주머니에 집어넣고 짝다리로 건들거리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본사 전략기획실에서 나온 오진성이라고 합니다. 만나 뵙게 돼서 반갑습니다. 에~ 모 매니저에게서 오늘 과정에 대해 사전에 어떤 설명을 들으셨는지는 모르지만, T그룹은 그리고 저는 MZ에서 잔뼈가 굵은 여러분들을 존중하고 존경합니다. 회사의 중요한 자산이라는 데 동의하고요. 다만 합병을 완성하는 과정에서 일부 T의 지향점과 거리가 있어 보이는 부분을 다듬어 보고자 여러분들을 모신 것이니..."

"보소 우리가 빙다리 핫바지로 보이요? 이래 딱 모아놓은 거 보잉끄네 뭔 수작인지 대번 알겠구마...쌉소리를 해가..."

영업팀 인천지부 박 부지점장이 투박한 사투리로 좌중의 침묵을 깼다. 오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지만 이내 창백하고 무감한 표정을 유지하며 입을 열었다.


"뭔가 오해가 있으신 것 같은데요...회사의 진정성을 그렇게 곡해하시면 서로 좋을 게 없습니다."

"곡해? 뭔 곡해? 나이 많고 인건비 높은 사람들만 골라서 모아놓은 거 보면 우리 보고 알아서 나가라 이 말 아닌가? 중요한 자산? 존경? 그 입에 발린 말을 믿으란 거요?"

물류팀 경기지부 김 부장도 거들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회사의 여러분들에 대한 진정성을 호도하지 마십시오. 계속 이런 식으로 회사를 음해하고 억측을 하시면 저도 상부에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습니다..."

"뭔 조치? 당장 해고라도 할 텐가? 노동조합도 안 만들고 평생 MZ를 위해서 일해온 대가가 고작 이거란 말이지? 가족 가족 해싸트만 합병으로 회사 넘기고 코빼기도 안 보이는 장 대표 그 작자한테도 속은 게지. 그래 어디 나부터 잘라봐라."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인데 위로금이라도 받으시려면 이성적으로 행동하셔야지 이 무슨 추탭니까?"

"추태? 추태라꼬?"

"이제야 본색을 드러낸다 이거지!"

오의 눈빛이 돌연 표독스러워지고 강의장 분위기는 점점 격앙되기 시작했다.


"오 프로님!"

별안간 고함에 가까운 일성이 과열된 공기에 찬물을 끼얹었다. 태백이었다.

"뭐 하시는 겁니까?"

"뭘 하다뇨? 제 일을 하는 겁니다."

"그만 나가주시죠!"

"뭐라고요?"

"나가 주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팀장님께 전달 못 받았습니까? 저는 T그룹을 대표해서 이 과정 감시... 아니 체크할 의무가..."

"아뇨! 제가 운영하는 세션입니다. 제 시간이고요. 오 프로님 정중히 부탁드립니다. 나가주세요."

태백은 오 프로의 말을 중간에 끊고 단호하게 쐐기를 박았다. 시종 흔들림 없던 창백한 오 프로의 얼굴이 일순 일그러졌다. 입술을 일자로 하고 뚫어지게 태백을 쏘아보던 오 프로는 들릴 듯 말 듯 낮은 저음으로 말했다.

"오늘 일, 그 책임을 묻게 될 겁니다."

그는 이내 단상에서 내려가 출입문 손잡이를 돌렸다.

"오 프로님!"

태백은 문을 열고 강의실을 막 나서려던 오 프로를 불러 세웠다.

"사과는 하고 가셔야죠? 정.중.히!"

오 프로는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코웃음을 한 번 치고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강의장을 빠져나갔다.




떠벌림이란 말만 하고 실행하지 못할 때 쓰는 말이다. 나는 내가 한 말은 실행에 옮긴다.

- 무하마드 알리


일본원숭이 무리를 관찰하면 재미있는 패턴이 보인다. 원숭이들은 먹이를 먹거나 상대의 털을 고르며 이를 잡아주거나 각자의 일에 집중하면서도 평균 5초마다 한 번씩 규칙적으로 어딘가에 시선을 보낸다. 다름 아닌 우두머리 원숭이다.


인간 역시 일을 할 때 리더의 눈치를 빈번하게 살핀다. 아침에 출근해서 팀장의 기분이 좋은지 나쁜지, 보고를 해야 하는데 상무에게 깨지고 온 것은 아닌지, 퇴근을 할 때도 팀장의 방에 불이 꺼졌는지 켜졌는지 거의 매 순간 확인하고 그로부터 직간접적인 영향을 받는다.


팀 내로 보면 맞선임과 팀장으로부터 가장 많은 영향을 받고, 회사전체로 보면 사장과 임원 중에서도 회사생활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제도를 다루는 인사담당 임원이 관심의 중심이 된다. 마치 평평한 광장에 우뚝 솟은 시계탑처럼 일거수일투족이 시시각각 모니터링 되고 아주 사소한 말이나 제스처까지도 어떤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곧 있을 변화에 대한 힌트가 아닐까? 신경을 곤두서게 한다.


조직 내에서 다수의 주목을 받는 위치에 서는 일은 긍정과 부정 양면을 모두 가진다. ‘왕이 되려는 자 왕관의 무게를 견뎌라’는 격언처럼 거대해진 권한과 책임 사이에서 아슬아슬 줄타기하는 곡예와도 같다.


문제는 책임감을 앞에 두고 말과 행동을 조심하는 리더가 정말이지 드물다는 점이다. 초반에야 어느 정도 긴장감을 가지고 초심을 잃지 말아야지 하다가도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처럼, 그 자리에 익숙해지면 돌변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이들이 독단으로 치닫기 시작할 때 가까운 곳으로부터 신뢰는 서서히 무너진다.


회사 자체를 큰 맥락의 리더로 본다면 각종 제도, 그중에서도 인사제도는 '신뢰'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요인이다. 제도는 그 자체로 표방된 '메시지'다. 우리 회사가, 우리 조직이 무엇을 가장 중하게 여기는지를 증명하는 바로미터다. 당장 급여인상, 평가, 승진 등 직접적인 실생활과도 연결된다.


일상생활에서의 공기나 물처럼 평소에는 특별한 영향력을 감지하지 못하지만, 연말이 다가오면 그 존재감은 커진다. 표방한 메시지를 얼마나 행동으로 옮겼는가?를 증명해야 한다. 이는 공정성, 투명성, 형평성의 세 요소로 이행된다.


공정성은 정해진 기준에 예외 없이 따랐는가

투명성은 적용 과정이 숨김없이 공개되는가

형평성은 남들과 비교해 더함이나 덜함이 없는가

를 충족한다.


문제는 인간이 운영하는 제도 치고 예외가 없을 수 없다는 점이다. 기준 자체가 처음부터 잘못되었을 수도 있고, 중요한 의사결정 과정이 밀실에서 소수의 권력자와 실무자에 의해 비밀리에 진행되기도 하고, 알 수 없는 이유로 내가 한 만큼 인정받지 못하는 억울함이 빈번히 발생한다. 평가권자 개인의 호불호, 사내정치게임, 나눠먹기, 최고권력자의 막무가내 개입 따위 변수가 시도 때도 없이 끼어들어 제도의 신뢰를 뒤흔든다.


불이익을 받은 개인 역시 뭔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알고도 회사에 이의를 제기하기 하기 힘들다. 용기를 내어 손을 들었다 해도

"나는 잘 주려 했는데, 위에서..."

라며 책임을 돌린다.

"어떻게 다 좋기만 할 수 있어. 조직생활 하다 보면 때로는 손해를 볼 때도 있는 것이지. 그거 다 결국 돌아와 그러니 잊어"

라는 무책임하고 공허한 위로가 이어진다.


대다수는 포기하고 순응한다. 체념하거나 받아들이기로 하지만 뭔가 응어리가 남는다. 그런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조직 전체에 불신이라는 실금이 그어진다. 어떤 인풋(돈, 시간, 노력)을 쏟아부어도 빠진 밑으로 줄줄 새 버리는 '밑 빠진 독' 상태가 된다.


이는 악순환의 고리를 만들어 또 다른 불이익과 불공정 이슈를 부르고 급기야 만성적 불신으로 이어진다. 진짜 밑 빠진 독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런 상태에서도 회사는 꾸역꾸역 돌아간다는 점이다. 이거 참 고약하다. '이래도 괜찮은가 보다' 조직원 모두가 불감증에 빠진다.


잘못된 제도를 관성적으로 유지하는 것도 문제지만, 제도를 바꾸는 일은 더 힘들다. 온전히 구성원들의 처우 개선, 성장, 편의를 위한 목적의 개선 시도조차 산으로 가는 경우가 많은데, 종종 특정인의 사심이 개입되며 조직 전체를 쑥대밭으로 만드는 일들이 벌어진다. 이를테면, 고위 임원이 계약연장을 위한 실적용으로 제도를 손보려는 경우다.


대개 2년 계약직 신세인 고위 임원들이 계약 마지막해에 그럴듯한 명분을 앞세워 실적용 개혁을 추진하는 사례가 많은데, 이 경우 변화의 본질은 간데없고 정해진 기간 내에 '큰 거 한방'을 터뜨릴 목적의 졸속, 강행만 남는다. 구성원에게도 눈과 귀가 있다. 아무리 감언이설로 포장하고 그럴듯한 명분을 꾸며 입혀도, 그 최종 결과물이 누구를 가리키는가? 가 선명해지면 숨겨졌던 누군가의 사심을 마침내 깨닫게 된다.


특히 경영난 등 기업이 위기에 빠졌을 때, 구성원들을 향한 경영진의 기만은 수시로 자행된다. '생존'이라는 전가의 보도를 앞세워 정리해고 등 비인간적 의사결정을 밀어붙이면서도 일말의 가책이 없다. 당장 현장의 원성을 무마하기 위해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툭 뱉었다가 별 고민도 없이 주워 담는 일은 셀 수도 없다. 한 번이 어렵지 두 번, 세 번 그다음은 일사천리다.


현역 시절 몸담았던 회사는 세 손가락 안에 드는 대기업 소속이었다. 비록 그룹 내에서는 매출이나 영향력면에서 존재감이 미미한 마이너 계열사에 불과했지만 그룹 오너家의 상징적 존재였다. 한때 안정적인 경영실적을 유지하며 13개 주요 관계사에 속하던 시절도 있었지만, 그룹 오너가 직접 강행한 대규모 투자 실패로 수천억 차입금을 떠안고 실적은 나락으로 떨어졌다.


수십억, 수백억의 적자가 수년간 이어지더니 급기야 그룹 내 메이저 기업의 자회사로 합병됐다. 그 과정에서 3차례의 인위적 구조조정이 단행됐다. 1500명이었던 직원 규모는 1000명 아래로 내려갔다. 오너의 투자 실패 책임을 일반 구성원들이 고스란히 짊어진 셈이다.


3차 구조조정을 앞둔 새 경영진은 피폐해진 조직 분위기를 수습하기 위해 '당분간 추가 구조조정은 절대로 없다'라는 말을 뱉었다가 2년도 못가 스스로 뒤집었다. 나는 이때 희망퇴직을 신청해 2년 치 기본급+자녀 학자금받고 나왔는데, 회사는 이번 기회가 아니면 이마저도 없을 알라는 메시지를 은연중 흘리기도 했다.


4차례의 구조조정 과정에서 수년간 손실분에 육박하는 대대적인 위로금을 쓰고 회사가 얻은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인적자원 측면에서도 타격이 컸다. 이 기간 회사를 떠난 이들은 다른 회사에서도 얼마든지 쓰임새가 있을 일 잘하는 사람들이 대거 포함되어 있었는데 정작 회사는 목표실적(희망퇴직 인원)을 달성했다며 환호했다. 그 일을 주도한 CEO와 임원은 고작 1회 계약을 더 연장했을 뿐이다. 무엇보다 경영진의 말을 더 이상 믿을 수 없다는 불신은 조직 전반에 걸쳐 뿌리 깊어졌다.


C플레이어를 어딘가에 모으는 일도 회사가 전달하는 하나의 메시지다. 마인드 셋업이니 새로운 기회니 포장해 봤자 '망신주기'를 통한 자발적 퇴사를 유도한다는 의도를 감추지 못한다. 이때 사람들은 숨은 메시지를 알아차리고 분노한다. 차라리 단도직입적으로 터놓고 이야기하면 수긍이라도 할 텐데, 평생 열정을 바쳤던 회사에 말할 수 없는 배신감과 상실감을 느낀다. 지켜보는 사람들 역시 말을 아끼지만 조용히 속내에 분노와 불신을 심는다.


허황된 선언, 사심을 숨긴 포장된 메시지가 난무하고 실제 벌어지는 일이 그와 다를 때 괴리감은 커진다. 이 간극이 클수록 구성원들의 회사, 경영진을 향한 불신은 짙어지고 냉소와 비아냥이 판을 친다. 경영진의 명을 받아 이 수상한 제도를 기획하고 앞장서서 이행한 인사부서는 경영진을 대신해 덤터기를 쓴다. 경영진=인사부서 라는 인식 때문이다. 얄궂다. 그렇게 회사는 구성원들로부터 신뢰를 잃고 모든 메시지는 더 이상 영(令)이 서지 않게 된다.


[스타벅스 웨이]의 저자 조셉 미첼리는 조직의 신뢰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직원들이 당신의 말을 듣고 그 말에 부합하는 행동을 볼 때, 그리고 상충하는 이해관계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려는 노력을 투명하게 알 수 있을 때, 또 당신이 그들을 배려하는 동시에 회사의 장기적인 지속가능성에 대해서도 신경 쓴다는 사실을 이해할 때 신뢰는 계속된다. 경영자는 정직성과 신뢰가 언행일치에서 온다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가치와 약속에 부합하는 행동을 하면서 자신의 취지, 실수, 성과를 전달해야 한다."


아주 작은 권위만 주어져도 그 영향하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주목의 대상이 된다. 지나가며 툭 던진 말 한마디가 메시지가 되어 삽시간에 소문이 되는 경우도 흔하다. 공과 사 명확한 구분 없이 그저 '좋은 게 좋은 거'라는 가치관을 가진 사람일수록 높은 자리에 올라 말실수가 잦은 이유다.


회사와 리더 그들은 어떻게 조직 내 신뢰를 형성하고 또 망가뜨려 왔는가?

진중하게 생각해야 할 때가 됐다.




제도와 인사발령 그 자체가 메시지다

제도와 시스템, 조직구조 등은 그 자체로 회사를 대표하는 메시지다.

우리 회사는 무엇을 중시하고 누구를 귀하게 여기고 어떤 행동과 성과를 높게 치는지 그 안에 모든 것이 들어 있다. 일종의 게임의 규칙을 제시한 룰이고 가이드고 판단과 행동의 표면화된 기준이다.


회사와 구성원, 서로의 탄탄한 신뢰 속에 조직이 운영되려면 관건은 공정성, 투명성, 형평성을 얼마나 확보할 수 있느냐다. 문제는 예외의 발생이다. 어떤 이유로든 제도의 운용에 예외가 발생하면 즉시 공신력은 흔들린다. 인간이 하는 일인 만큼 제도 역시 완전할 수 없지조직 모두가 공유하는 약속인 만큼 빈번한 예외 발생은 치명적이다. 회사의 표면화된 메시지는 신뢰를 상실하고 더 이상 원활히 작동하지 않는다.


예외를 최대한 억제하되, 굳이 예외를 적용해야 한다면 별도의 예외조항을 따로 만들어 모두에게 공표하고 동의를 얻어야 한다. 왜 그렇게 되었으며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 최소한 납득 가능하게 '설명'해야 한다. 주머니 속 곶감 빼먹듯 최고 권력자의 맘대로, 실무자의 재량으로 마구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


드라마 <미생>에서 장백기는 전무의 낙하산으로 입사한 장그래를 향해 이렇게 말한다

"절차라는 건 장그래 씨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것인지도 모르죠. 일종의 약속이니까요. 많은 사람들은 그 약속을 믿고 준비하고, 계획하고, 실행하거든요. 최소한 그 약속을 믿고 사는 사람들이 바보가 되는 일은 없어야 하는데."


최고의 스펙을 가졌으면서도 고졸출신 낙하산 장그래를 향해 생긴 내면의 열등감을 표출하는 장면이었지만, 나는 장백기의 말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물론 당사자를 앞에 두고 필터도 없이 직격 하는 모양새가 썩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메시지 자체는 지나치게 타당하지 뭔가? 약속에 대한 예외는 없어야 하는 것이 기본이고, 혹시라도 발생했다면 최소한 충분한 설명과 양해가 뒷받침되어야 마땅하다


제도를 변경할 때는 더 조심해야 한다. 제도 변경을 지시하거나 실행하는 측의 '사심'이 개입될 가능성을 끊임없이 경계하고 본질에서 벗어나지 않는지 살펴야 한다. 그 결과물이 전적으로 구성원의 편의, 성장 등 본질에서 비껴 특정인, 조직으로 편중되어 있을 경우 '사심'은 금세 그 정체를 드러내게 마련이다. 잘 숨길 수 있다고 착각하지 말라. 그런 꼼수 쓸 시간에 진정으로 구성원에게 좋은 방향이 무엇인지를 고민하라.


인사발령 역시 그 자체로 메시지가 된다. 조직개편으로 새로 만들어지거나 강화되거나 아예 없어지거나 축소되는 조직을 보면 이 회사가 어떤 기능을 중시하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말로는 구성원의 행복한 조직문화 구축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 해놓고 조직문화 기능을 없애거나 대폭 축소시키는 조직개편을 단행한다면 제 발등 찍는 꼴이다.


제도의 운영과 변화, 조직구조와 핵심인재 평가와 승진을 중심으로 한 인사발령에 신중을 기하라. 그 자체에 구성원을 향한 강력한 메시지가 담겨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 특정인의 사심과 확립된 기준의 빈번한 예외를 경계하라.  


리더의 모든 말과 행동이 메시지가 된다

어떤 위치에 오르면 그 자체로 하나의 시계탑 같은 존재가 된다.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시계탑을 기웃거리며 몇 시가 되었는지 살핀다. 그 시간에 맞춰 먹을 것이 나오고 중요한 공지가 나오고 누가 어디에 있었는지 무엇을 했는지 확인받기 때문이다.


그때 시계탑이 엉뚱한 시간을 말하거나 때가 되지 않았는데 종을 울린다면 혼란이 생긴다. 한 번이면 실수로 넘어가지만 두 번 세 번 반복되면 시계탑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한다.


리더는 모두가 주목하는 대상이다. 말 한마디, 행동 하나에 신경을 곤두세운다. 명확하게 메시지를 전달하지 않으면 혹시나 그 안에 중요한 메시지가 있을까? 곱씹고 지레짐작하느라 시간을 다 허비한다. 조직 내 헛소문은 그 과정에서 대부분 양산된다.


공과 사 구분 없이 쓸데없는 말이 잦은 리더일수록 자신의 말이나 행동이 구성원들에게 어떤 메시지로 작용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다. 앞뒤가 다른 표리부동한 사람으로 인식되는 이유다. 뒤늦게 '내가 언제 그런 말을 했어?' 라며 화들짝 놀라는 일이 잦다면 평소 스스로의 말버릇과 행동을 되짚는 시간을 가질 필요가 있다.


구성원의 입장에서도 리더의 모든 말을 귀담아듣고 숨겨진 본의를 해석하느라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다. 중요한 순간에 필요한 메시지는 대개 혼란의 여지없이 명확하다. 사실상 별 의미도 없이 내뱉았을 가능성이 높은 리더의 말과 행동은 그냥 흘려도 좋다. 홀로 확대 해석해 앞선 걱정을 한다거나 불필요한 절차로 인풋을 낭비하지 말고 모호하다면 즉시 되묻고 확인하라. 그 과정에서 리더 역시 뜻밖의 피드백으로 스스로의 언행을 되돌아볼 기회를 얻게 된다.


원활한 조율은 상호 이해와 신뢰를 강화할 최선의 무기다.


나쁜 소식일수록 리더가 전면에 나서라

리더라면 나쁜 소식일수록 직접 소통하라. 회사의 사정이 나쁘면 왜 나쁜지, 얼마나 나쁜지 속시원히 털어놓고 심사숙고 끝에 어렵게 내린 결단임을 알려라. 최종 의사결정자가 당신인 것을 아는데, 그것을 마치 다른 이의 책임인양 떠넘기지 말라.


시간이 없다는 핑계도 대지 말라. 지금 그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다. 당사자뿐 아니라 남은 사람들에게도 메시지가 되기 때문이다. 전면으로 나설수록, 이 결정의 진정성과 고뇌가 담겼음을 믿게 마련이다. 고통스럽고 곤란한 시점에 책임을 가진 자가 홀로 쏙 빠져 타인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일만큼 불신을 자초하는 일은 없다. 떠나는 사람에게는 물론 남은 이들에게도 그렇다.


'나는 나쁜 말을 못 하는 사람'이라는 착한 사람 콤플렉스도 집어치우자. 무책임하고 진정성도 없는 감언이설로 포장도 할바엔 모질어지는 편이 백번 낫다. 왜 그런 결정을 내렸는지 정확한 팩트에 기반해 사실관계를 당사자에게 알려주는 일이야 말로 멋진 배려다.


회사, 리더는 공적인 이유로 구성원과 '헤어질 결심'을 할 수도 있다. 그때 무엇이 부족했고 어떤 면이 지금의 우리와 맞지 않았는지 객관적 시선으로 통보해 주면 당사자는 그 부분을 받아 들고 스스로를 되돌아보고 개선할 기회를 얻는다.


두루뭉술 와닿지도 않는 좋은 말들로만 포장해 E-mail로 띡 통보하는 일이야말로 최악이다. 오랜 시간 함께 울고 웃고 성장한 구성원에 대한 예의도 아니다. 남은 이들 역시 마지막 순간 저런 대접을 받겠구나, 쓰임새를 다하면 이메일 한통으로 버려지는구나. 불신의 씨앗을 심는 악행이다.


젊음, 열정, 인생의 많은 부분을 함께 한 회사와의 마지막 순간이 어떤 모습이면 좋을까? 퇴사 이후에도 끝까지 존중하고 존중받았던 기억으로 남는 것이 낫지 않을까? 감정을 담은 덕담은 그다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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