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아시아산 어둡고 무거운 티크 재질의 가구들은캘리포니아에어울리지 않을 것 같다는 이유로Hoarder 성향이 있는 남편이 오래된 가구를 버리자고 먼저 제안했다. 물론 버리고 싶은 게 많았던 나에게는 너무나 반가운 일이다.
지난 몇 주, 물건을 버리고 버리고 버렸다.
좋은 물건을 중고 시장에 내놓아 헐 값에 처분했으니 버린 거나 다름없다. 거저 준대도 아무도 가져가지 않아 남아 있는 가구와 물건은 고물상에 돈을 주고 처분하고 전압이 맞지 않아 가져가지 못하는 냉장고나 건조기 같은 가전제품은 지금 세 살고 있는 집에 남겨 두기로 했다.
한국은당근마켓에 내놓으면 못 파는 물건이 없던데 싱가포르는 쓰던 물건 처분하는 게 너무 어렵다. 잠시 살다가 떠나는 주재원들(expatriates)이 많다 보니 중고 시장에 좋은 물건이 헐 값에 넘쳐나도 사는 사람이 거의 없다. 싱가포르에 새로 정착하는 사람들이 사주면 좋으련만 집세가 비싸다 보니 집크기를줄여 오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라 싱가포르에발령받아 새로 정착하는사람들도 기껏힘들게 부쳐온물건들을 처분해야 할 처지에 놓이기 일쑤다. 결국 들어오는 사람, 떠나는 사람 모두들 '그놈의 물건, 짐덩이' 때문에 애를 먹는다.
미얀마에 살 때 구입한 테이블을 중국계 싱가포리안 여자에게 팔았는데 매매되고 며칠 후 혹시 테이블 상판인 흰 돌의 출처를 알고 있었냐며 연락을 해 왔다.
나무로 된 테이블 다리와 틀을 마음에 드는 색으로 칠하려고 상판과 분리했는데 돌로 된 상판에 뭔가 희미하게 글씨가 새겨져 있어 해독한 결과, 누군가의 비석이었던 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단다.
무거운 상판을 뒤집어 볼 일이 없었던 지라 나는 전혀 몰랐다. 27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한 여자의 비석을 그동안 집에 예쁘게 모시고 살았다는 것을.
내가 10여 년을 예쁘게 모시고 살았던 누군가의 비석. 보고만 있어도 머리가 멍해지는 이삿짐
월요일부터 본격적인 이사가 시작됐고 이삿짐센터 사람들이 와서 하루 종일 드르륵, 찍찍 소리를 내며 상자를 만들어 물건을 넣고 다시 찌지직 소리를 내며 테이프로 상자를 붙이는 게 계속되고 있다.
싱가포르에서 출발하는 이삿짐이 캘리포니아에 도착하기까지 4~6주 정도 걸린다 한다.집에 온 지 한 달 만에 우리의 '장기 호텔 투숙생활'이다시시작되었다.
앞으로 한 달 반 정도 호텔에서 생활할때 필요한 물건과 옷가지들을 챙겨 보니 큰 여행 가방 6개 분량이나 된다. 방 한편에 놓인 여행 가방을 보고 있자니 전생이라는 게 있다면 나는 여행자의 짐에 붙어 세상을 떠돌던 생명력 강한 빈대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넋이 나간 듯 몸도 마음도 지친 채 이삿짐 사이에 앉아 지청펀을먹기 시작했는 데 먹다 보니 이게 이렇게 맛있는 거였나 싶어 새삼스럽다.
돼지 내장을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지청펀(猪肠粉, chee cheong fun)은 광동식 음식으로 딤섬 식당이나 호커 스톨에서 먹을 수 있다. 쌀가루와 타피오카 또는 찹쌀가루와 물을 섞어 만든 반죽을 얇게 펴서 찜기에 넣고 찌다가 돼지고기나 새우를 넣어 세 번 정도 돌돌 말아서 혹은 아무것도 넣지 않은 쌀반죽만 말아서 만든 음식이다.
지청펀(猪肠粉, chee cheong fun)
처음 지청펀을 먹었을 때는 세상 뭐 이리 아무 맛도 안나는 음식이 있나 싶었다. 소금 간도 되지 않은 맹탕의 부드러운 흰쌀 반죽은 탄수화물만 잔뜩 든 환자식 같았고 씹히는 게 없어 맛을음미하기도 전에 꿀꺽 넘어가아쉬웠다. 유티아오,카야 토스트, 콘지만큼 싱가포르 사람들이 아침으로 자주 먹는 음식이지만 일부러 찾아 먹을 만큼 즐기지 않았던 지청펀이 지치고 피곤한 오늘 같은 날 먹으니 속에서 걸리는 것 없이 후루룩 맛있게 잘 넘어간다. 이곳을 떠날 때가 되어서야 진정한 지청펀의 맛을 알게 된 것 같다.
틀니 낀 노인네들이나 좋아할 맛이라고 했던 음식이 맛있는 걸 보니내 입맛도 나이가 드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