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3월 홋카이도 여행 4일 차
아사히키와의 눈 내린 밤을 보내고 평소보다 일찍 일어났다. 귀국하는 날이기도 하지만 간발의 차이로 정상으로 향하는 곤돌라를 놓친 어제의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다시 대설산으로 향해야 하기 때문이다. 선배님과 나는 나름 승부욕이 강한 사람이라 대설산의 정상을 누리는 것을 다음 여행으로 미루기에는 성에 차지 않았기에 대설산에서 신치토세공항으로 가는 시간이 빠듯하기는 했지만 무리해서라도 한 번 도전하기로 의기투합하였다.
아침잠이 많은 Y도 배려해 줘서 모험을 강행할 수 있었고 전날 일정이 변경되어 Y에게 보여주지 못했던 흰 수염폭포로 향했다. 이른 시간이라 숙소에서 키오스크로 셀프 체크아웃하며 누군가 일본은 아직도 현금 사용만을 고수하는 아날로그의 나라라고 했던 글이 떠올랐다. 한국처럼 식당에서도 각자의 테이블에 앉아 키오스크로 주문하는 시스템을 서서히 적용하고 있고, 카카오페이로도 결제할 수 있는 유통 환경의 변화를 직접 경험하니 과연 일본이 아직도 아날로그의 나라인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개항하여 서구문물을 받아들여 강대국의 반열에 오른 경험을 가진 일본이 아직도 현금 사용만을 고수한다고 말하긴 어려울 것이다. 에스콘필드만 보더라도 식당에서 현금사용 대신 신용카드로 결제하는 것만 봐도 일본에서도 현금사용이 점점 줄어들 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아마도 몇 년 후에는 스마트폰이 없으면 일상생활에 지장을 받을 정도로 모바일 결제가 자연스러워지지 않을까 예상한다. 물론 대부분의 편의점이나 가게에서는 신용카드 결제가 가능하며 현금을 더 선호하는 문화의 뿌리가 깊을 뿐이다.
새벽부터 짐을 챙겨 나온 터라 다들 피곤했는지 고요함 속에 40여 분을 달려 도착한 흰 수염폭포, 아무도 없을 것이라 예상했지만 정적 속에 웅장한 폭포소리를 카메라에 담고 계신 한 분이 계셔 깜짝 놀랐다. 청의 호수가 푸른빛을 발산하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하는 흰 수염폭포의 소리를 들으며 아무도 밟지 않은 눈길을 걸을 때 나는 뽀드득 소리가 청량하게 들렸다. 로버트 프로스트의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떠올리며 지금 내가 밟고 있는 이 발자국의 의미를 다시금 생각할 수 있었다.
흰 수염폭포와의 짧은 만남을 뒤로하고 9시 정각에 출발하는 대설산 로프웨이에 탑승하기 위해 서둘러 이동했다. 거리는 짧지 않지만 어제부터 내린 눈이 쌓여 있기에 오르막길을 엉금엉금 올라가야 할 수도 있어서 여유롭게 출발해야 다음 일정에 지장을 주지 않으리라. 어제 눈앞에서 놓친 곤돌라를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체 바라만 봐야 하는 실수를 두 번 다시 반복하지 않기 위해, 집중하여 눈길을 달렸고 8시 40분경 대설산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아무도 없을 것이라 예상했던 이곳도 아침 일찍부터 스노 보드와 스키를 즐기려는 사람들로 북적거렸고 서둘러 탑승권을 구매한 덕분에 우리의 계획대로 9시 정각에 출발하는 곤돌라에 탑승할 수 있었다. 우리를 제외하고 왕복 탑승권이 아닌 편도 탑승권을 구매한 스키어를 보면서 대설산 정산에서 스키를 타고 내려오는 기분은 어떨지 상상해 보았다. 예전 눈앞에서 사고 나는 장면을 목격한 이후로 스키나 스노보드 타는 시도 자체를 하지 않았던 내게 대설산의 정경은 또 다른 고정관념을 깰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들었다.
10분 여를 곤돌라를 타고 도착한 대설산의 정상은 말 그대로 고요함과 순백의 미로 뒤덮인 공간이었고, 오늘 오지 않았더라면 평생을 두고 후회할 뻔했을 정도로 이번 여행 중 가장 인상 깊은 곳이자 하이라이트였다. 왕복 2,600엔의 비용이 하나도 아깝지 않을 정도로 너무 좋았고 봄이나 가을에 다시 방문하여 트레킹을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훗날 가족여행으로 한 번 더 방문하고 싶을 정도였다. 자신의 등급에 따라 하강 코스로 이동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내리는 눈을 보고 흥분한 강아지처럼 대설산을 뛰어다녔다.
아쉽게도 이런 정경은 우리에게 단 10분만 허락되었다. 20분에 내려가는 곤돌라에 탑승해야만 오후 1시까지 렌터카 반납 후 공항에 도착할 수 있기에 눈앞에서 곤돌라를 놓친 아쉬움보다 열 배는 더 큰 아쉬움을 뒤로하고 대설산 정상에서 내려왔다. 빠른 속도로 대설산을 내려가는 스키어를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다음에는 대설산에서 반나절을 여유롭게 보낼 수 있도록 일정을 짜서 재방문해야겠다는 마음으로 직원 한 분과 우리만 있는 곤돌라의 적막을 누렸다.
곤돌라에서 내려 빠르게 자동차로 이동해 눈 쌓은 내리막길을 내려갔다. 아침 식사도 하지 못해 허기진 상태였지만 마음과 눈에 가득 담은 대설산의 풍경 덕분에 배고픈 줄 몰랐고, 오르막길을 올라갈 때 보다 더욱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하며 눈길을 달렸다. 고속도로로 올라오니 도로에 눈이 거의 녹아 운전하기 편했고, 렌터카 반납 시간 전 주유까지 할 수 있도록 조금 속도를 냈더니 휴게소에서 간단하게 요기할 수 있는 여유가 있었다. 시간이 촉박하긴 했지만 예정대로 렌터카 반납 후 공항으로 가는 셔틀버스에 아무런 사고 없이 탈 수 있었다.
여행 중 가장 긴장이 풀어지는 순간이 바로 지금이다. 내가 운전하지 않는 셔틀버스에 탑승하여 차창 밖 홋카이도의 풍경을 보면서 한국에서와는 반대방향으로 운전해야 하는 긴장감은 눈 놓듯이 사라졌다. 공항에 도착하여 잠깐 우체국에 들러 아내와 아이에게 보낼 국제우편을 접수하고 출국 수속을 하였다. 아이는 출국 전부터 자신이 좋아하는 젤리를 사 와야 한다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이야기했고, 아내도 홋카이도 비스킷을 부탁했기에 면세점으로 갔지만 탑승 시간도 촉박했고 면세점에 대기줄이 길어 아이의 선물만 구매할 수 있었다.
비행기 탑승 전 아내에게 미안하다는 메시지를 전송하였지만 마음이 편하지 않아 기내 면세품을 찾아보았지만 아내가 부탁한 상품은 없었다. 실망할 아내의 얼굴을 떠올리니 다음 여행 때는 면세점에서 구매하기보다는 이동 중 파손이나 분실 등의 부담이 될 수 있겠지만 미리 구입하는 방법을 적용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행 선물이야 대단한 것은 아니지만 항상 홋카이도 여행을 지지해 주고 허락해 주는 아내에게 선물을 주지 못함이 정말 미안했다.
최근 비행기 관련 사고가 많아 이륙과 착륙의 순간 나에게도 사고가 일어나지 않을까라는 불안감이 엄습해 오는 이번 여행은 감사하게도 아무런 사건, 사고 없이 무사히 귀국할 수 있었다. 수화물을 찾는 곳에서도 가장 먼저 우리 캐리어가 나와 빠르게 짐을 찾고 그리운 집으로 향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홋카이도 여행 중 가장 긴박한 일정을 보낸 하루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를 귀국일정을 보내며 2025년 3월의 홋카이도 여행도 막을 내렸다.
1. 프롤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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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여행 준비
https://brunch.co.kr/@ilikebook/1036
3. 1일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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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2일 차
https://brunch.co.kr/@ilikebook/1038
3. 3일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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