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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안 Sep 06. 2020

다들 샤프는 30년 정도 쓰지 않나요?

이 정도는 되어야 명품이지! #05  파커 조터 메커니컬

1954년 미국 파커*사는 전설의 조터(Jotter) 시리즈를 선보인다.

(*표기법 상 Parker로 파커라고 하는 것이 맞지만 국내 수입업체가 파카로 상표를 등록해 두었다. 하지만 글에서는 파커라 부를 것이다.)


이미 파커 51(1939년 출시)로 1940년 이후 만년필 시장을 장악한 파커 사는 볼펜이 만년필 시장을 잠식하기 시작하는 것을 감지하여 조터(Jotter) 시리즈를 출시한다. 이후 파커 사는 조터(Jotter) 시리즈로 50년간 무려 7억 5천만 개를 판매하는 기염을 토하게 된다.


파커 다움을 나타내는 화살모양의 클립


파커 조터 시리즈의 주역은 볼펜이지만 나는 메커니컬 펜슬 (샤프)를 가지고 있다. 출시 당시 파커 조터 시리즈는 볼펜과 함께 메커니컬 펜슬, 만년필도 출시하였다.

파커 조터 시리즈의 가장 우수한 점이라면 간단한 구조 (배럴, 상단 덮개, 내부의 메커니즘 만으로 이루어져 있다.)와 질리지 않는 외양이다.


내가 파커 조터 메커니컬 펜슬 (이하 조터)를 만난 지 30년을 향해 가고 있다.

나는 문구류를 좋아한다. 하지만 수집은 싫어한다.

이런 나에게 새로운 문구를 소유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다 쓰거나 분실하거나 고장 나는 것이다.

불행히도 나는 약간의 편집증적이고 강박스러움을 함께 가지고 있어 무엇을 잃어버리는 일이 없었다.

덕분에 필통에 넣어 다니며 책상 위에서만 사용하는 문구류를 잃어버리는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럼 고장이 나야 하는데 조터는 간단한 구조 때문에 고장이 나지 않는다.

수많은 볼펜, 연필, 지우개, 노트를 섭렵하는 가운데 메커니컬 펜슬은 조터 하나뿐이었다.

다른 메커니컬 펜슬을 빌려 써보고 욕심을 부려보기도 했지만, 결국 조터 하나뿐이었다.


이런 별난 성격 덕분에 써서 없앨 수 있는 다른 문구류와 달리 만년필과 메커니컬 펜슬의 선택은 나에게 극도의 신중함을 요구한다.


단아함 그리고 군더더기 없음. 조터를 나타내는 가장 좋은 표현이 아닐까?


상대적인 가치가 중요한 물건들의 선택을 위해서는
Referenece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문구는 기능적인 가치를 추구한다.

기능이 존재 이유인 문구류의 경우 기능의 가치를 충실히 이행한 후에야 절대적인 가치를 창출할 수 있다.

문구와 같이 기능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물건일수록 경험과 상대적인 가치가 중요하다. 많은 것을 경험해 보아야 비교가 가능하고, 절대적인 가치보다는 취향에 따르는 상대적인 가치에 선택이 좌우된다. 상대적인 가치가 중요한 물건들의 선택을 위해서는 Referenece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동일한 기능을 가진 다른 물건들을 비교하기 위해서는 비교 기준이 되는 Reference가 확고해야 한다. 시도 때도 없이 바뀌는 Reference는 Reference로의 가치가 없다.


나에게 메커니컬 펜슬의 Reference는 조터이다.

30년이란 시간 동안 쥐어온 부족한듯한 그립, 심이 한 클릭 나올 때의 클릭감, 분해를 위해 배럴을 돌리는 감촉... 이후 나에게 주어진 메커니컬 펜슬들은 모두 조터의 감각에서 우열을 비교당했다. 메커니컬 펜슬에 관한 나의 모든 취향은 조터로 결정된다.


단순한 것일수록 구별하기 어렵다.


단순한 것일수록 구별하기 어렵다.

단순하고 가격이 높지 않은 물건일수록 더욱 구별하기 어렵다.

단순하고 가격이 높지 않은 물건은 비슷해 보이기 때문이다. 오랜 시간의 익숙함으로 숙성된 Reference를 가지지 못한 이들에게 단순하고 싼 물건들은 '소모품'이라는 딱지가 붙어 쉽게 버려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비슷하다고 해서 구별하지 않으면 삶의 결이 거칠어진다.

세련된 삶은 비싸고 화려한 물건에서 구별되기보다 단순하고 기능적인 물건으로 구별된다.

소유자의 취향을 가늠하고 그의 선별안과 심미안을 간접적으로 알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1.1 나는 가성비가 싫다.

1.2 허세가 왜 죄악이지?

1.3 이 정도는 되어야 명품이지!

1.4 돈을 주고 물건만 산다고?


2.1 다들 샤프는 30년 정도 쓰지 않나요?

2.2 부족한 3m는 내 명예로 채우겠소.

2.3 이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만년필이 될 거야

2.4 단돈 200원에 볼펜의 끝을 보여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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