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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안 Sep 09. 2020

단돈 200원에 볼펜의 끝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이 정도는 되어야 명품이지! #08 동화 스피디볼 1.0mm (속기용)

1969년 미국의 NASA는 인간을 달으로 보내려는 시점에 우주에서 쓸 수 있는 필기구가 필요했다. 

무중력 상태에서는 기존의 필기구를 사용할 수 없어 NASA는 엄청난 예산을 쏟아부어 우주에서도 쓸 수 있는 우주펜을 개발해냈다.

미국의 우주인들이 자랑스럽게 개발한 우주펜을 러시아 우주인들에게 보여주자, 러시아 우주인들이 이렇게 되물었다.

“그냥 연필 쓰면 되잖아?”


누구나 아는 유머로 쓸데없이 어렵게 생각해서 시간과 노력을 낭비한 사례로 많이 회자되곤 한다.


©pixabay


사실 이 이야기에는 많은 거짓말이 숨어 있는데 우선 볼펜은 무중력에서도 잘 쓰여진다. 초기 볼펜은 잉크가 묽어 중력의 영향을 많이 받았지만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다. 믿지 못하겠다면 벽에 붙은 종이에 볼펜으로 글을 써보라. 옆으로 놓여진 펜은 거의 무중력에 가까운 조건이다. 그래도 믿기지 않는다면 누운 상태에서 천장에 붙은 종이에 글을 써보라. 중력을 거스르는 상태에서도 볼펜은 잘 나온다.


유럽의 우주인 페드로 듀크는 2003년 러시아의 소유즈를 타고 우주정거장으로 가게 되는데 그는 러시아의 우주인들이 일반 볼펜을 사용하는 것을 보고 놀랐다. (그는 그때까지 우주에서는 우주펜으로만 썼다고 한다.)

러시아 우주인들에게 우주에서 일반 볼펜을 사용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놀란 그는 진실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자신이 가지고 있던 볼펜을 직접 가지고 우주로 향하게 된다.

그리고 가져간 그 볼펜으로 자신의 일기를 기록했다.


러시아 우주인들이 연필을 사용했다는 것도 약간의 거짓이 섞여있다. 우주펜을 사용하기 전까지 연필이나 메커니컬 펜슬을 미국과 러시아 모두 사용했으나 산소가 가득 찬 우주선 내부 공간에서 연필이나 메커니컬 펜슬의 흑연가루가 위험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1969년에는 러시아는 크레용과 같은 그리스 펜을 사용했었고, 미국은 피셔사가 NASA의 지원 없이 개발한 우주펜을 구입해서 사용했다. (이 우주펜의 성능은 정말 놀라운 수준이다. 중력 대신 기압을 조정한 질소가 주입되어 잉크를 밀어내고 잉크도 펜촉에 붙어있는 볼이 회전하기 전까지는 젤형태를 유지할 수 있었다. 물속에서 쓸 수 있는 것은 기본인 데다가 영하 45도에서 영상 200도까지의 온도 변화에도 견딜 수 있는 이 볼펜을 2달러 40센트에 팔았다. 심지어 아직도 NASA가 사용하고 있으며, AG7 Original Astronaut Space Pen으로 찾으면 아마존에서 $51.85에 구입이 가능하다!)


진짜 NASA에서 쓰는 우주펜을 판매하고 있다.



우주에서도 사용이 가능한 놀라운 필기구인 볼펜은 1940년 이후부터 그때까지 주력 필기구인 만년필을 밀어내기 시작하여, 1950년대 파커사의 조터(Jotter) 시리즈가 공전의 히트를 치면서 사실상 볼펜의 전성시대가 열렸다.


이렇게 사용이 편하고 값싼 볼펜은 빠르게 퍼져나갔다. 오늘날 볼펜은 필기구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만년필과 연필은 극히 소수의 사람들이 쓰는 특이한 필기구가 되어버렸다. 넓은 수요층을 딛고 다양한 볼펜들이 출시되기 시작했고, 국내의 경우는 제트스트림, 사라사 등으로 대표되는 일본 볼펜(엄밀하게 유성펜, 중성펜 등으로 구분해야 하나 모두 볼펜으로 부르겠다.)이 장악하고 있다.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느낌이 든다.


동아 스피디볼 1.0mm 속기용 (이하 스피디볼)은 누구나 외양을 보면 단번에 알아볼 수 있다. 사용을 해봤지만 이름을 몰랐던, 그 누구나 제목은 알고 있으나 읽지 않는다는 고전문학과 같은 볼펜이다. 이와 외양이 유사한 볼펜이 수없이 많다.


앞으로 칭찬 일색이 될 터이니 단점부터 이야기하자면, 저가 볼펜들이 모두 동일한 배럴 업체에서 공급받는지 똑같은 볼펜을 수없이 찾을 수 있는 특징 없는 외양 그리고 부족한 그립감이다. 나의 경우 부족한 그립감은 EVA 재질의 별도 그립을 부착하여 사용하거나 기존에 사용하던 그립이 좋은 볼펜에 볼펜 심만 옮겨서 해소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대로 쓰는데 손이 익어서인지 큰 불편함이 느껴지지 않아 그대로 사용하는 편이다. 부족한 외모와 그립감, 이 두 가지가 내가 말할 수 있는 유일한 단점들이다.


이런 단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피디볼을 소개하는 이유는 엄청나게 저렴한 가격으로 일본제 문구류를 압도한다. 개당 200원 남짓한 가격으로 사실 비교한다는 것이 민망한 수준이다. 제트스트림 리필심보다도 싼 가격은 부족한 외양을 눈감아 주기에 충분하다. (다만 아쉬운 것은 버려지는 플라스틱 배럴을 아끼기 위해 리필심도 판매해 주었으면 한다. 리필심 가격은 도대체 얼마가 되어야 할지는 모르겠다.) 순수하게 기능적인 가치만을 평가한다면 스피디볼의 절대 가치가 200원을 충분히 넘는다고 보장할 수 있다.


4400원 / 24개 = 183.3원


그 와중에 성능은 고가의 유성(중성) 펜에 필적한다. 특히 저가 볼펜에서 사용자를 당황시키는 첫 필기 때의 끊김이 거의 없다. 엄청난 사용자층을 보유하고 있는 제트스트림과 비교한다면 덜 부드럽지만 거칠다기보다는 사각거리는 느낌으로 절제된 필기감을 전해준다. 미끄러운 필기감은 부드럽고 고급스럽다는 느낌을 전해주기도 하지만 빠른 필기가 필요할 때나 획과 획을 구별해야 할 때 특유의 미끌림으로 글자가 날아가곤 한다. 제트스트림이 미끄러움과 사각거림 사이에서 미끄러움 쪽으로 힘을 줬다면 스피디볼은 둘의 조화가 적절하게 이루어진 느낌이다.

속기용이라고 굳이 배럴에 각인할 정도로 빠르게 글씨를 써 나갈 때 발군의 필감을 보여준다.


경험론자들은 경험을 통하여 필요한 것과 불필요한 것을 명징하게 구별하고 불필요한 것은 과감하게 버려간다. 그러한 과정을 통해 오롯이 남은 필요의 덩어리는 기능적인 가치를 극한으로 끌어올린 제품으로 인정받는다. 경험론자에게 스피디볼은 수많은 경험의 물줄기로 불필요한 것들을 모두 흘려보낸 후 필요의 체에 걸러져 남은 기능적 가치의 퇴적물이다.



그래서 경험이 중요하다.
경계까지 걸어 나가는 그런 경험이 중요하다.


스피디볼과 함께 내가 애용하는 볼펜은 몽블랑 제품이다. 펜의 첨단에는 다이아몬드가 위세를 뽐내며 붙어있는, 스피디볼과는 끝과 끝을 점유하는 볼펜이다. 두 볼펜은 같은 세계의 반대 방향 경계를 점유하고 있다. 하나의 세상을 알기 위해서는 경계까지 나아가는 것이 필요하다. 경계에 도달했을 때 비로소 세계의 크기를 인식하기 때문이다. 내게 두 볼펜은 세계의 양 경계를 경험할 수 있도록 해 주는 사물이다. 

그래서 경험이 중요하다. 경계까지 걸어 나가는 그런 경험이 중요하다.


실패를 줄이기 위해, 시간을 아끼기 위해, 우리는 타인의 경험을 받아들인다. 하지만 무엇이 좋은지, 어떠한 차이가 있는지를 알기 위해 경험하는 것은 집단 지성의 결론을 거스르는 어리석음이 아니다. 나라는 존재에 맞는 물건은 세상의 중심에서도 만날 수 있고, 경계에서도 만날 수 있다. 


그러하기 위해서는 경계까지 걸어가는 용기가 필요하다.



1.1 나는 가성비가 싫다.

1.2 허세가 왜 죄악이지?

1.3 이 정도는 되어야 명품이지!

1.4 돈을 주고 물건만 산다고?


2.1 다들 샤프는 30년 정도 쓰지 않나요?

2.2 부족한 3m는 내 명예로 채우겠소.

2.3 이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만년필이 될 거야

2.4 단돈 200원에 볼펜의 끝을 보여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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