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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재민 Apr 26. 2021

아메리카노 앞에서 멍 때리다 낙타를 보았다

얼음이 녹는 속도만큼, 기억력도 서서히 녹나 보다

저녁을 먹고 나와 산책로를 걸었습니다. 낮이 길어져 저녁 7시가 넘었는데 날이 훤합니다. 산책로에는 봄의 절정에 핀 꽃들과 녹음 짙어가는 풀과 나무, 그 옆과 앞과 뒤로 사람들이 흘러가듯 지나갑니다.     

 

저만치 군중과 일정한 보폭과 거리를 두고 이 눈치 저 눈치 살피며 이동하는 길고양이 한 쌍도 보입니다. 산책로 중간에 위치한 커피숍을 들렀습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을 시켜 놓고 진동벨이 울리기를 기다립니다. 그 찰나의 시간, 머릿속에는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애써 ‘생각’이라는 걸 하고 싶지 않았지만, 아무런 생각이 떠오르지 않아 다행이었습니다.      


테이블 구석에 앉아 커피잔을 앞에 놓고 우두커니 실내 공기를 마주합니다. 정면으로 외국인 청년이 혼자 앉아 노트북을 뚫어져라 보고 있습니다. 제가 사는 동네 근처에는 어학원이 많아 외국인 강사와 유학생들을 자주 봅니다.      


청년의 노트북 앞에는 종이 묶음이 있고, 그 옆에는 커피잔이 놓여 있습니다. 노트북을 응시하던 외국인 청년은 간간이 종이 위에 무언가를 적기도 하고, 심각한 표정을 짓기도 했습니다.      


나이는 젊어 보였으나, 20대인지 30대인지 확실히 구별하긴 어려웠습니다. 아메리카에서 왔는지, 아프리카에서 왔는지 모르겠지만, 피부는 검었습니다.      


확실한 건 그는 지금 자기 일에 집중하고, 진지하게 일을 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이따금 빨대를 물고 커피 몇 모금을 홀짝이긴 했지만.     


커피숍 벽면에 걸린 그림을 보다가 왜 난 낙타를 떠올렸을까.

한 사람만 너무 쳐다보고 있는 것 같아 미안했지만, 손님은 저와 그 외국인 청년밖에 없었기에 딱히 시선 둘 만한 곳을 찾지 못했습니다. 휴대폰을 갖고 있었지만, 온전한 휴식을 취하고 싶어 쳐다보지 않았으니까요.     


시선은 다시 청년을 향했고,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 청년의 부모는 어떤 사람일까. 코로나로 전 세계가 난리인데, 타국에 자녀를 보내 놓고 얼마나 불안할까.     


외국 유학까지 보낼 정도면 부유층일까, 아니면 혼자 힘으로 아르바이트를 하며 돈을 버는 걸까. 온갖 잡생각을 하는 동안 커피잔에 든 얼음이 서서히 녹기 시작했습니다.   

   


빙하가 녹으면서 해수면이 상승하는 것처럼, 고체의 액체화로 커피 용량이 늘었음을 느꼈을 때 크게 한 모금을 들이켰습니다. 그때 ‘드르륵’하는 자동문 소리가 들렸고, 한 무리의 일행이 안으로 들어섰습니다. 세명의 청년이 계산대로 가 달달한 음료를 주문하는 동안, 제 앞의 커피잔은 어느새 얼음덩어리만 남았습니다.


주문을 마친 일행은 제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고, 가방에서 주섬주섬 노트북을 꺼냅니다. 무슨 과제를 하러 왔는지, 아니면 게임을 하러 왔는지.   

   

외국인 청년에게 가졌던 궁금증이 청년 무리로 전이되려는 순간 ‘피식’ 웃음이 나왔습니다. 저녁밥 잘 먹고 나와 커피나 조용히 마시다 갈 일이지, 별 쓸데없는 생각과 걱정이나 하고 시간을 죽이고 있는 상황을 직시했기 때문입니다.     


혼자 놀기의 재미가 이런 걸까요? 들어갈 땐 날이 훤했는데, 나와보니 어스름이 짙게 깔렸습니다. 외국인 청년이나 우리나라 청년들이나 저녁에도 할 일이 많은 가봅니다. 그들도 저처럼 쉬면서 다른 곳도 바라보는 여유를 가졌으면 좋겠습니다마는...      


돌아오는 길에 마트에 들러 건전지를 샀습니다. 노트북 무선 마우스에 넣을 건전지입니다. 알고 보니, 저는 건전지를 사러 나왔던 거였습니다. 제 기억력도 아이스커피 얼음 녹는 것처럼 서서히 녹나 봅니다. 새 건전지 갈아 끼고 노트북 폅니다.       

낙타     

동물원에서 봤었지
덩치 큰 그 녀석.
속눈썹은 늙은 작부의 눈 화장처럼
길고 풍성했고,
시골집 송아지마냥 생긴 눈망울은
알사탕만 한 눈물방울 또르륵 떨어질 듯
영롱했다.  

얼굴부터 덥수룩한 털은 턱과
목 아래까지 덮어 자태를 뽐냈고,
짐짝처럼 매단 등허리 혹 두 개
인생의 고개처럼 굽이친다.     

땅을 딛고 서 있는 네 다리는
무게를 감당할 수 있을까 모를 만큼
가늘고 여위어,
하루 벌어 하루 사는 빈자의 오늘인 양
불안하고 초조하고 위태롭다.     

사람들 시선을 의식하듯
기품 있는 동작으로 걸음을 옮긴다
아타카마 사막 어디서 태어났을까,
사하라를 지나왔을까, 고비를 지나왔을까.
어디서 길을 잃고 여기까지 흘러왔을까.     

작열하는 태양 아래
사막의 모래바람맞으며 걸어가는
낙타들의 행렬이, 보이는 듯 사라진다. -류재민 <낙타>

*상단 이미지 출처: 픽사 베이(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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