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 매니저 레터. 5] 알아도 모르는 척 봐도 못본척, 아이들만의 세계
알아도 모르는 척 보여도 못 본척알아도 모르는 척 보여도 못 본척
스토리스튜디오 혜화랩(Story Studio, 이하 '스스')은 이야기를 읽고 보고 듣고 만드는 일이 궁금한 12-19세 청소년들을 위한 열린 작업실입니다. 작업실을 찾는 스스러들은 자기 작업을 마음껏 시도하고 꾸준히 지속할 수 있습니다.
스토리스튜디오의 운영자 만 매니저입니다.
오랜만이죠? 시간이 훌쩍 지나 무더웠던 여름은 가고 찬바람이 살랑 불어오는 가을이 찾아왔습니다. 한여름 스스에서는 아이들도 부쩍 자라고 작업물도 많이 영글었어요.
얼마 전 한 스스러가 어머니와 함께 놀러 왔어요. 아이는 들어가고 어머니는 복도 한편에 서서 한동안 스스를 둘러보셨어요. 어머니는 스스에 새로 생긴 운영자 컬렉션이 흥미로워 보여 한참을 들여다보셨다고 해요.
"아이가 6학년이 되고 사랑에 부쩍 관심이 많아졌어요. 얼마 전에는 '사랑이 뭐야'라며 물어보기도 했죠. 이런 책들을 보고 뭔가 느낀다면 좋겠어요."
스스를 이용하는 12-19세는 취향이나 관심사가 분명 해지는 시기이기도 하지만 사랑하는 마음을 배우고 연습하는 시기이기도 하죠. 운영자를 하다 보면 그 시기 아이들만의 세계가 보이곤 해요. 저도 그 시기를 이미 지나왔기 때문이겠죠. 그냥 친구였던 아이의 말 한마디에 갑자기 마음이 설레기도 하고, 같은 반 아이와 눈이 마주쳤을 뿐인데 심장이 쿵쾅 거려요. 옛날에는 온몸을 부딪혀 가며 놀았는데 이제는 살짝 스치기만 해도 찌르르 몸이 울리는 그런 시기 말이에요.
이런 스스러들의 특징을 담아 '나만 몰라 첫사랑, 나만 없어 첫사랑'이라는 제목으로 첫사랑 컬렉션을 만들었어요. 컬렉션 아이디어는 '알려주세요. 당신의 마음으로 가는 길'이라는 이름의 롤러코스터를 만든 스마일캣 덕분에 얻을 수 있었어요.
같은 반 친한 친구가 남자 친구가 생겼는데 제게 비밀로 하더라고요. 그걸 나중에 알게 되었어요. 저도 첫사랑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밉기도 하지만 부러웠어요.
스마일캣은 첫사랑에 빠진 같은 반 친구에게 배신 아닌 배신을 당하고 첫사랑이 궁금해졌다고 해요. 현실에서는 겁이 많아서 롤러코스터를 못 타지만 영화에서 보면 다들 사랑하는 사람과 탄다며 마인크래프트에서 남자 친구와 함께 타는 롤러코스터를 만들었어요. '듀근콩닭 연애 학원' 포스터를 만들기도 했답니다.
이처럼 몽글몽글 생겨나는 사랑에 대한 관심은 그대로 작업에 묻어나기도 해요. 공룡을 좋아하는 다이너소어는 공룡 만화를 연작으로 그리고 있어요. 얼마 전 새로 시작한 <애니원 스쿨> 시리즈는 학원 액션물처럼 보였는데 교장 선생님의 막내딸 큐라가 등장한 이후 학원 로맨스물로 바뀌었어요. 큐라는 주인공 티라노를 짝사랑해서 고백을 하고 둘은 사귀는 사이가 되죠. 다이너소어에게 직접 경험한 이야기인지 물어보았어요.
아니에요. 저는 아직 사랑을 해본 적은 없어요... 티라노가 큐라를 나쁜 선배들로부터 구해줬으니 좋아하게 된 거예요.
스스러들은 작업을 하며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을 계속 연습하고 있었어요. 어떻게 상대를 사랑해야 하는지 또 나를 사랑해달라고 말해야 하는지 작업 안에서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는 것이죠. 이런 모습은 비단 작업물뿐만 아니라 현실에서 나타나기도 해요. 남녀 친구들이 뒤섞여 그룹으로 오는 경우 더 직접적이죠.
스스에 자주 오는 중학교 1학년 혼성그룹이 있어요. 평소에는 작업을 하는데 하루는 작업에 크게 관심을 보이지 않으며 영화를 보겠다고 하더라고요. 하지만 영화는 보는 둥 마는 둥 자기들끼리 진실게임을 시작했어요. 누가 좋아한다더라, 누구는 몰래 사귄다더라, 근데 너는 누구를 제일 좋아하냐며 얼마나 비밀이 많은지 한참 동안 속닥속닥이 끊어지지 않더라고요. 내 마음은 들키고 싶지 않지만 관심이 가는 친구의 비밀은 알고 싶은 그 시절만의 두근거림.
또 다른 그룹에서는 두 여자 아이가 그룹 안에 한 남자아이를 좋아하게 되었어요. 어릴 때부터 다 같이 몰려다니는 친구였다고 하는데 끌림이라는 게 이렇게 얄궂어요. 문제는 얼마 지나지 않아 커플이 만들어졌다는 거예요. 혼자가 된 여자 아이는 졸지에 친구의 남자를 좋아하는 상황에 빠지게 되었죠. 그래서일까요? 아이는 더 이상 스스를 찾지 않아요. 두 친구의 꽁냥꽁냥 모습만 보아도 속이 제 속이 아닐 거예요. 수많은 이별 노래가 내 노래가 되는 사랑의 쓴맛도 하나씩 알아가는 시기가 찾아왔죠.
은은하게 전해지는 짝사랑의 신호도 보여요. 톱질을 할 때 서는 위치도 달라요. 말을 걸 때 뉘앙스도 다르고요.
아이패드 드로잉을 좋아하는 한 스스러의 그림을 유심히 들여다보면 매번 같이 오는 아이에 대한 호감이 느껴져요. 멀리서 작업을 하는 그 아이를 힐긋힐긋 바라보며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요. 자신이 재미있게 읽은 첫사랑 컬렉션을 대뜸 가져가서 읽으라고 강요해보기도 합니다. 그렇게라도 마음을 전하고 싶었던 걸까요? 정작 그 아이는 아무것도 모르는 거 같아요. 아이패드 드로잉 안에서만 이루어지는 나직한 고백을 보고 있자면 만 매니저가 큐피드로 변신해야 하나 싶기도 해요.
하지만 모름지기 현명한 운영자라면 아이들의 사랑의 맹아를 알아도 모르는 척, 보여도 못 본 척해야겠지요. 아이들만의 세계, 아이들이 자라나는 시간을 온전히 그들만의 것으로 지켜주고 싶어요. 청소년 로맨스 소설의 배경이 스스라면 운영자는 너스레 웃음을 지으며 아이들의 안부를 물어주는 든든하지만 실없는 어른 정도 역할이면 충분하지 않을까요?
대신 사랑을 알아가는 이 시기가 우리 인생에서 항상 있진 않은 신록의 시기이고, 몸도 마음도 훌쩍 자란다는 걸 알고 있기에 응원하는 마음을 컬렉션에 실어 전하려고 했어요.
"RJ님, 첫사랑 컬렉션을 거의 다 읽었는데 어떤 작품이 가장 기억에 남고 재미있었어요?
"<열세살의 여름>이 제일 좋았어요."
"어떤 부분이 가장 맘에 들었어요?"
"맨 처음에 여자 주인공이 남자 주인공을 좋아하게 되는 장면이 있는데요. 이걸 맨 마지막에 남자 주인공 시점에서 다시 그려줘요. 남자 주인공도 사실 여자 아이에게 관심이 있었어요. 이게 좋았어요. 이 작품은 바다와 사랑이라고 키워드를 적었어요."
초등학교 6학년 열세 살의 여름을 스스에서 <열세살의 여름>을 읽으며 보낸 RJ는 가을에 접어든 지난 주말 이미 다 읽은 책을 다시 꺼내 들었어요. 첫사랑 컬렉션은 끝나서 서가로 들어갔는데도 기어코 찾아냈죠. 쑥스러웠는지 묻지도 않았는데 '독서카드를 쓰려고요'라며 헤설프게 웃는 RJ에게서 '투두둑' 사랑이 싹트는 소리가 들렸답니다.
만 매니저가 특히 좋아한 <사랑이 훅!>의 진형민 작가의 말로 레터를 마무리할게요.
결국 나는 사랑을 통해 성장했습니다. 여러분도 그러하리라 믿습니다. 여러분이 앞으로 만날 모든 형태의 사랑을 힘껏 응원하겠습니다. 그리고 훗날 내가 더 나은 사람이 되면 더 깊은 사랑이야기를 또 쓰겠습니다. 그때까지 나도 계속 사랑하겠습니다.
다음 운영자 컬렉션의 주제는 '스포츠'에요. 이번에는 아이들의 반응이 어떨지 궁금하지 않으세요? 네트를 두고 펼쳐지는 땀과 눈물, 노력과 재능, 우정과 사랑, 경쟁과 미움. 온갖 청춘의 키워드들이 담길 스포츠 컬렉션을 통해 또 한 뼘 자라날 스스러들이 기대가 됩니다.
그럼 다음 레터에서 또 인사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만 매니저 드림.
첫사랑 컬렉션 리스트
영화: <렛미인>, <플립>, <싱 스트리트>,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귀를 기울이면>
도서: <똥두>, <열세살의 여름>, <사랑이 훅!>, <5번 레인>, <송현주보러 도서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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