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낮에도 선선한 바람이 불어 드디어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오나 싶더니, 요 며칠 동안은 다시 더위가 기승을 부렸다. 이렇게 날씨가 변덕을 부리는 모양을 보고 있으면 마치 계절과 새 계절의 경계선 위를 줄타기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오죽 더우면 침대에서 잠을 청하다가 새벽에 깨서 찬 마룻바닥으로 잠자리를 옮길 때도 있다. 요즘은 그렇게 깨서 다시 잠이 들기 전까지 창 너머로 풀벌레 우는 소리를 가만히 듣는다. 특정한 소리가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촉매처럼 느껴질 때가 있는데, 여러 겹으로 울리는 풀벌레 소리는 내게 공간감과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나는 내가 살고 있는 작은 방에 누워 눈을 감고 그동안 떠나왔던 곳을 하나둘 천천히 떠올렸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수많은 이사를 경험했다. 엄마는 군인인 아빠와 결혼한 뒤 그를 따라 몇 번이나 이사를 했는지 확인하기 위해 초본을 떼어 본 적이 있다고 했다. 손으로 짚어가며 일일이 세어보니 마흔 번이 넘었다고. 엄마는 이사를 “징그럽다”라고 표현했다. 우리 가족은 아빠가 새 근무지로 발령이 날 때마다 전국을 떠돌아다니며 살았다.
이사를 하면 할수록 엄마는 이사의 달인이 되었다. 이사 업체에서 주로 이른 오전 시간부터 트럭에 짐을 실으러 왔기 때문에, 이삿짐을 꾸린 후 우리를 데리고 새로운 거주지로 이동하는 것은 가정 주부였던 엄마의 몫이었다. 아빠는 아침 일찍 출근한 뒤 이사가 다 끝나면 새 집으로 퇴근을 했다.
이삿날은 분주했다. 잠도 채 깨지 않은 이른 아침에 눈을 비비며 일어나면 어느새 이사 업체 직원들이 신발을 신고 집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그들은 능숙한 솜씨로 이삿짐을 담을 플라스틱 박스들을 집 안으로 옮기고, 가구에는 테이프를 발라 안에 든 물건들이 쏟아지지 않게 고정을 시켰다. 무거워 보이는 짐을 망설임도 없이 번쩍번쩍 들고 나르는 그들을 보며 신기해했던 기억이 난다. 엄마는 직원들에게 어느 짐을 어떻게 실어야 하는지, 특별히 조심히 다루어야 할 짐은 어떤 것인지 알려주느라 분주했다. 한편, 언니와 나는 세수를 하고 옷을 갈아입은 채 사람이 적은 방 한 구석에 앉아 어서 이사가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우리는 새로 살게 될 집에 대한 선택권이 없었다. 군에서 정해주는 지역의 관사에서 살았기 때문이다. 관사는 여러 형태가 있어서 마당이 딸린 개인 주택부터 아파트까지 다양한 집에서 살아보았다. 어쩌다 군 가족들만 사는 아파트 단지로 이사를 가게 되면 엄마는 가정교육을 더 철저히 시켰다.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일반 아파트와는 다르게 군 가족들은 서로서로 다 아는 사이여서 이웃 주민이 되면 보는 눈이 그만큼 늘어난다는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일례로, 나는 그때 집에서 배운 대로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치는 어른들 마다 꼬박꼬박 “안녕하세요.”하고 인사를 했고, 실제로 내가 인사성이 밝다고, 그 애가 누구네 집 딸이라고 소문이 날 정도였으니까 말이다.
속사정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나라에서 공짜로 살 집도 제공해 주니 좋지 않냐고 했지만, 엄마는 시간이 지난 뒤 우리가 어렸을 때 집을 사두지 않은 것을 두고두고 후회했다. 사택이 하나라도 있었으면 우리가 여러 번 이사를 다니며 마음고생을 하지 않아도 됐을 거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여러 곳을 전전하며 살았던 우리 가족에게 집은 고정되어 있는 실체라기보다, 곧 떠날 곳이자 정을 주면 곤란한 곳이었다. 공간에는 그곳에 지냈던 시간 동안의 기억과 정서가 묻어 있다. 키가 얼마나 자랐는지 눈금을 표시해두었던 벽, 누구의 방이라고 팻말을 붙였던 방문, 장난을 치다가 얼룩이 생겨버린 벽지……. 일방적인 명령 하에 집을 떠나게 되면 그 모든 것들을 마음에 꼭꼭 묻고 새 터전으로 가야 했다. 성장기 내내 이사가 반복되자, 나는 거리를 돌아다니다가 집 안을 꾸미는 데 쓰는 예쁜 장식품이나 잡동사니 같은 것을 발견해도 구경만 하고 사지 않는 습관이 생겼다. 그런 모든 것들은 이사 갈 때마다 전부 짐이 되었기 때문이다.
몇 년 전에 내가 어릴 적 살았던 집을 지나친 적이 있다. 가족들과 함께 다른 볼 일이 있어서 차를 타고 그 동네를 지나다가 우연히 차창 너머로 옛날 집을 발견한 것이다. 나는 그 집 마당에서 뛰어놀았고, 나무에 묶인 그네를 탔고, 겨울이 되어 눈이 쌓이면 집으로 올라가는 언덕 위에서 플라스틱으로 만든 가짜 스키도 탔다. 그때는 언덕이 높아 보여서 스키를 처음 탈 때 긴장을 했던 기억이 난다. 엄마가 두려워하는 나의 손을 옆에서 잡아 주셨다. 그러다가 몇 번 시도를 하고 나서는 혼자서도 즐겁게 스키를 탔다. 낙차를 느끼며 신나게 위에서 아래로 내려갔다가 다시 걸어서 언덕 꼭대기까지 올라가기를 반복했다.
그러나 근 이십 년 만에 보게 된 옛날 집은 너무나도 작았다. 시멘트로 만든 회색 언덕은 낮았고 집은 볼품없게 철조망에 가려 덩그러니 혼자 놓여 있었다. 그 집이 유년의 추억이 가득 서려 있는, 내가 기억하는 최초의 집이라니 믿을 수가 없었다. 실제 공간과 내 기억 속 집의 이미지 간 격차가 주는 충격은 컸다. 그러나 나는 그 경험을 통해 내가 그리워하는 것은 물리적으로 실재하는 특정한 공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불현듯 깨달았다. 그 집에 다시 가서 현실의 삶을 살고 싶은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떠나도 언제든 돌아올 수 있는 곳, 마음을 놓을 수 있는 곳, 다시 말해 삶의 원점이 되는 곳을 꿈꿔왔던 것이다.
그러나 내게 삶의 원점이라는 것이 정말 존재할 수 있을까? 지금껏 어느 곳이든 적응할 만한 시기가 되면 그곳을 떠나야 했다. 그곳에서 만났던 사람들과도 마찬가지로 이별해야 했다. 이러한 물음은 내 안에 뿌리내려 그림자처럼 나를 따라다녔다. 새로운 환경에서 처음 만나는 사람들과 인사할 때도, 시간이 지나며 결국 그곳을 떠나 작별 인사를 할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생각이 여기까지 다다르자, 나는 내가 지금껏 겪었던 수많은 만남과 이별을 수반한 환경의 변화가 과연 내게 어떤 것이었는지 생각해보게 되었다.
풀벌레 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고 있다 보니 어느새 잠에 빠져 있었다. 꿈속에서는 벌써 새로운 계절이 성큼 다가와 있다.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옷장에서 소매가 긴 옷을 꺼내 입고, 손목과 귓가에 새로 산 향수도 뿌린다. 거리를 걸으며 바뀐 계절에 어울리는 노래를 선곡해 감상한다. 평소에 지나치던 집 앞 거리의 풍경, 공기의 냄새, 사람들의 표정, 키가 훌쩍 커 버려 늘어진 나무 그림자의 모양이 전부 새롭게 느껴진다. 그런데 왜일까? 길을 걷다 보면 어느 순간 내 안의 추억들이 약속처럼 저만치 멀리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