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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담Tea Nov 06. 2022

2022년 10월 29일

참 좋은 날입니다. 온 세상이 너만 힘내면 아주 살 만한 곳이라고 알려주듯, 바람도, 햇살도 참 좋습니다. 옆에 있는 이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다, 아무 말 없이 손잡고 어디론가 훌쩍 떠나야만 손해보지 않을 것만 같은 그런 날입니다. 하지만 그런 시간을 잠시 미뤄두고, 한참을 떨어져 각자 살다가 앞으로 영원히 서로 함께 하기로 약속한 000 양과 000군의 결혼식을 마음으로 축하해 주기 위해 이 자리에 와주신 하객 여러분에게 신랑, 신부를 대신하여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특히, 아들, 딸을 몸과 마음으로 키워 제 짝을 만나고,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있도록 40여 년을 밤낮으로 애쓰신 양가 부모님들의 헌신과 사랑에 경의를 표합니다.  

    

저는 신부 000 양을 만났던 이십여 년 전처럼 여전히 고3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올해로 24년째입니다. 그런데, 제가 학생들에게 수업을 잘한다는 소리를 좀 듣습니다. 인기도 좀 있습니다. 하지만 지나고 보니, 그 비결은 딱 하나더군요. 제가, 약속을 잘 지키는 겁니다. 짧게 하겠다는 약속보다 수업을 무조건 1-2분 일찍 끝내주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도 약속드립니다. 오늘, 이 주례도 5분 정도 하겠습니다. 만약, 제가 제 주례사에 스스로 빠져 허우적거리다 5분을 넘기면, 지성인들이신 하객분들께서 야유를 보내거나, 이것저것 던지지 마시고, 한분 두 분 조용히 식사를 하시러 일어나시면, 얼른 눈치차릴 수 있을 듯합니다.    

 

요즘은 주례사를 생략하는 추세이지요. 그런데도 오늘 제가 이렇게 주례사를 하게 된 건, 저와 신부의 인연 때문입니다. 제가 교직 생활을 이십 년 넘게 하면서 가진 버킷리스트가 몇 개 있습니다. 그중 하나가 책을 쓰는 것이었는데, 여기 있는 이 책이 그중 하나입니다. 교사들이 학생들을 어떻게 만나고 무엇을 알려줄까에 대한 책이라 못 보신 분들이 더 많으시리라 생각됩니다. 그래서 책이 출간된지는 몇 해가 지났는데도 책이 잘 팔리지 않는가 봅니다. 혹시 이 책에 관심 있으신 하객분들이 계시면 개별적으로 남아서 주문 부탁드립니다~^^     

느닷없이 제 책 이야기를 드리는 이유는 오늘의 신부인 000 양과 그 친구들도 이 책 속에서 이십여 년 전의 모습 그대로, 물론 가명입니다만 여전히 여고생으로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는 열일곱 저의 딸이 함께 와 있습니다. 부족한 아빠에게 살아가는 힘을 주는 듬직하고, 사랑스러운 딸입니다. 오늘도, 그득한 뷔페 음식 때문은 분명 아닐 겁니다. 늘 옆에서 보던 익숙한 아빠의 생애 첫 주례가 궁금하기도 하고, 떨지 않게 응원을 해 주기 위해서 망설임 없이 아빠와 동행을 해 준, 당당한 10대입니다.      


그런 제 딸의 나이, 바로 이 나이 때, 오늘의 신부 000 양을 만났습니다. 버건디색 재킷에 체크무늬 치마 교복을 입고, 친구들과 수다를 떨고, 울고, 웃고 하던 모습 말입니다. 오늘의 신부, 000 양은 친구들과 항상 정의로웠고, 건강했고, 정성을 다했고, 평화를 사랑했던, 눈물 많고 웃음 가득한 예쁜 아이였습니다. 그런 10대 때의 안목을 잃지 않고 있다가 오늘의 신랑, 000군과 백년해로를 하겠다고 마음을 먹고 저를 여기까지 불러다 세운 걸 보면, 저의 제자는 아니지만, 000군 역시 어떤 사람인지 확인해 보지 않아도 마음이 그저 든든해질 뿐입니다.      


오늘은 2022년 10월 29일입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여전히 3년 동안이나 계속되고 있는 코로나19로 마스크를 쓰고 사진을 찍었던 날로, 그나마 다행히 결혼식은 올릴 수 있었던 날로 기억될지도 모를 날입니다. 하지만, 오늘의 신부와 신랑에게 10월 29일은 단 하루뿐만, 한 번뿐인 기억의 날이 될 겁니다. 오늘을 잊지 않고, 잃지 않고 살아냈으면 하는 바람으로 딱 한 가지만 당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보통 주례사에서는 흔히 부부는 일심동체라는 말을 합니다. 몸과 마음이 하나라는 뜻이지요. 하지만 이십년 넘게 살아오면서 가만히 생각해 봅니다. 오늘의 신부, 신랑처럼 사십여 년을 가까이 떨어져 각자의 집에서, 각자의 방식과 가치관으로, 각자의 관념 속에서 배우고 자란 이들이 오늘, 10월 29일, 결혼식이라는 세리머니 이후에 갑자기 일심동체가 될 수는 없는 겁니다. 하지만, 사랑하기 때문에, 만나서 헤어져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기 싫기 때문에 오늘 이 자리에 함께 서 있는 건 분명합니다. 그래서 결혼은 또 다른 인생의 과제를 하나 받는 겁니다. 아니, 결혼이 아니라면, 어쩌면 필요 없을 수도 있는 과제를 하나 더 실천하겠다고 스스로 다짐한 겁니다. 000 양과 000 군에게 당부드립니다.     


부부는 이심 이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내는 그리고 남편은 서로가 내 반쪽이 아니라, 그 자체로 온전한 한쪽입니다. 반쪽이라 생각이 들면, 무의식적으로 내 것을 강요하게 됩니다. 살다 보면 욱하고 올라올 때가 분명 있습니다. 아니, 아주 자주 있을 겁니다. 아마 결혼식을 준비하면서 이미 여러 번 욱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럴 때는 바로 내뱉지 않기 바랍니다. 톡 하지 않기 바랍니다. 전화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루, 이틀 정도 자신 안에 가둬서 이리 굴리고 저리 돌려보시기 바랍니다. 그 시간이 너무 길어서 답답하다면 한, 두 시간 만이라도 자신 안에 더 가지고 있다가, 내가 위로받고 싶을 때가 아니라, 내가 위로해줄 수 있는 에너지가 내 안에 생겼을 때, 말하고, 톡 하고, 전화 걸기 바랍니다. 그때가 비로소 상대가 온전한 한쪽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을 때입니다. 이 버릇을 잘 들이는 과정이, 한쪽과 한쪽이 커다란 하나가 되는, 진짜 부부가 되는 과정의 전부입니다. 유일한 길입니다.      


코로나 때문에 우리는 ‘사회적 거리두기’라는 말을 알게 되었고, 3년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몸소 실천하고 살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칼릴 지브란은 우리의 사회적 거리두기를 이미 오래전에 예언하듯 이야기했습니다. 함께 있되 둘 사이에 정서적 거리를 허용하면, 그 간격 사이로 오늘 같은 바람이 불고, 햇살이 들어차 눅눅했던 몸과 마음이 뽀송하게 변하게 됩니다. 서로의 잔을 채워 주되 한쪽의 잔만을 마시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함께 노래하고 춤추며 즐거워하더라도 서로는 혼자 있게 하라는 의미입니다. 커다랗고 웅장한 우리의 궁궐이 무너지지 않도록 받쳐 들고 있는 기둥들 역시 서로 떨어져 있는 이유입니다. 거대한 숲 속일수록 나무들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자라는 이유입니다.       


부부는 분명 이심 이체입니다. 몸도 마음도 각자의 것을 서로 존중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 마음이, 내 마음이고, 내 몸이 그의 몸이라는 것을 서로 인정하는 겁니다. 같은 공간에 살지만, 그 사람만의 공간을 인정해야 합니다. 오늘 주례를 하면서, 함께 한 딸도 조만간 이심 이체를 연습하러 떠나겠다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습니다. 그때까지 서로 정성을 다해 다투고, 화해하고, 사랑하겠습니다. 오늘 이 자리를 만들어 주신 신부 000 양과 000 군도, 그리고 이 둘을 온몸으로 축하해 주시기 위해 오신 하객분들께서도 잘 먹고, 많이 사랑하고, 깊게 기도하시기를 기원드립니다.




딱 일주일이 지났습니다. 분명, 참 좋은 날이었습니다. 이십여 년 만에 사랑했던 제자를 만나, 주례를 섰습니다. 결혼식 내내 하객들의 머리 위로는 윤슬이 넘쳐났습니다. 눈물 많은 제자 덕분에 주례가 울컥하는 사고(?)를 내버렸지만, 너무 행복한 날이었습니다. 함께 동행했던 딸이 엄지 척을 해주었던, 슴슴하게 좋은 날이었습니다.  제자 부부를 신혼여행 떠나보내고, 시내 여행을 잠깐 하다가 집에 들어온  한참 뒤였습니다. 눈시울이 붉어진 딸이 보여 준 동영상은 눈을 의심케 했습니다. 심지어는 축제의 퍼포먼스인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렇게 29일, 그날의 행복이 깊은 피로와 커다란 슬픔이 되어 녹아내려 한주 내내 가슴이 답답합니다. 마치, 젊은이들이 거기에 그렇게 많이 있었던 게 참사의 핵심인 듯 내비치는 악다구니들에 가슴이 짓눌립니다. 젊은이들 대신 하얀 국화꽃이 넘쳐나는 광경이 너무 공포스럽습니다. 


2022년 10월 29일. 저에게, 딸에게, 제자 부부에게도 잊을 수 없는 날인 것처럼, 친구와 젊음을 즐기기 위해 만났던, 그들의 젊음을 지켜주기 위해 동행했던, 그들의 영원한 가족들 모두에게 잊지 말아야 할 날이 되었습니다.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부디 그 젊음을 영원히 잃지 마시고 편안하게 쉬시기를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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