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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땅꼼땅꼼 Oct 26. 2024

아빠의 숙명, 벼농사

내 인생 메뉴 <한식>편


아빠는 왜 둘째로 태어나셨을까.


당신이 선택한 것도, 이미 바꿀 수도 없는 그 질문을 나는 어릴 적에 많이 품었었다. 이는 일은 일대로 다 시키면서도 너무나 무시하는 듯한 할머니의 말과 행동 때문.

(엄청 작은 체구에도 불구하고 엄하고 빳빳했던 할아버지와는 상반되었던지라 더더욱)

 

아빠는 4남 3녀 중 둘째로 태어나셨다.

자식은 많은데 반해 살림은 녹록지 않았던 할아버지는 맏아들을 공부시켜 성공하는 걸 선택하신 듯하다. 그 시절(지금도 완전 시골인데) 깡촌이었던 곳에서 큰아버지는 대학 공부까지 마치고 고등학교 국어 교사가 되었다.


이곳저곳 전근 다니시며 살았다는데, 내가 가본 큰아버지댁은 고향의 시내에 자리 잡은 연립주택이었다. 편편한 옥상이 있는 그 건물에는 멀리서도 항상 빨랫줄에 주렁주렁 옷들이 널어있는 게 보였던 기억이 난다. 사촌 언니들과 오빠는 시내에서 살았던 덕분인지 어릴 때부터 커피도 마시고, 팝송을 즐겨 듣는 우리와는 완전 다른 삶을 살았다.


큰아버지 다음인 아빠.

뒤로 쭈루루 달린 동생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자기희생을 해야 했던 K-장녀의 그림자가 아빠에게도 씌워졌다. 게다가 그나마 남자라는 점에서, 아들 없는 친척집의 양자로 호적을 옮기기까지 해야 했다.

 

"이 분은 누군데요?"


연중 집에서 치러지는 제사가 너무 많았다. 내가 뵌 적도, 알지도 못하지만 할아버지의 조부모님, 부모님까지는 유교 사상으로 이해가 되었다. 그런데 그분들을 빼고도 제사는 많았다. 그 제사상을 차리며 물은 거다.


"아빠가 양자로 들어가 있는 집, 할머니."


서울에 사는 은주 언니(호칭이 맞나 모르겠다)의 부모님이라고 했다. 제사를 모시기 위해 호적상으로 양자로 들어간 것도 기함할 지경인데, 그럼 그 집만의 제사만 모시면 될 걸 집안의 다른 제사까지 몽땅 챙겨야 한다니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미지 출처) Pixabay


이런 이해되지 않은 채 쌓여가는 불만은, 사실 농사일 때문에 더욱 도드라졌고 두터워졌다. 타지에서 교사 생활을 하는 큰아버지를 대신해 아빠는 문중 땅도, 할아버지네 땅도, 그리고 우리가 먹고살 땅에도 벼를 심고 농사를 지어야만 하셨다.


아빠의 많은 농사일은 자식인 우리한테도 영향을 미쳤다. 부족한 일손을 채우기 위해 우리는 사시사철 시간만 나면 노동에 동원되었다. 아직까지도 어린이날 하면 기억나는 게, 모판에 흙을 담고 씨눈이 오른 볍씨를 고루 편 뒤 다시 흙을 덮어 모판을 자근자근 밟았던 장면이다. (그게 자라 싹을  틔우면 '모'가 되고, 그걸 논에 심어 가을까지 키워내면 벼, 쌀이 되는 것이다) 농촌에서의 5월은 너무도 바쁜 때이고, 어린이날은 일요일에 더불어 주어지는 일손을 돕는 날일 뿐이었던 것이다.


초등학생 때인지, 중학생 때인지 자다가 눈을 뜬 내게 보이는 것은 아빠의 뒷모습이었다. 앞으로 잔뜩 수그리고 방바닥에 앉아 이따금씩 짧고 깊은숨을 내뱉으셨다. 그 옆으로 엄마도 연신 수건을 갖다 대셨다. 두 분의 주변으로 피에 흥건히 젖은 수건이며 헝겊나부랭이들을 던져져 있었다.


아빠의 오른손 네번째 손가락은 한 마디가 없으시다


논에 물을 받아야 할 시기였다. 그래서 밤새 경운기에 펌프를 연결해 물을 퍼올리고, 물이 얼마나 찼는데 보러 가는 게 아빠의 필수 일이었다. 경운기뿐만 아니라 많은 기계가 매달렸으니 어떤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저 그중 어느 한 기계에 아빠의 손가락이 끼었고 무참히 잘라버린 사건이 난 것이다.


사건이었을 그 일이, 기계에 자주 신체의 일부를 버리는 일이 많은 시골에서는 피를 닦아내며 지혈을 하고 피가 그치면 기계에 바르는 노오란 기름을 칠해서 치료해 버리는 것으로 끝내버렸다. 무서워서 두려워서 더 묻지도 어쩌지도 못했지만 두고두고 생각했다. 아빠의 잘린 손가락을 들고 병원으로 달려갔다면, 어쩌면 이어 붙여서 다섯 개의 손가락이 있지 않았을까. 그리고 얼마나 고통스러우셨을까.


유년시절 농사일을 도와야 했던 우리 남매처럼, 형부도 신랑도 결혼 후 농사일을 도왔다. 옷에 흙을 잔뜩 묻혀가며 모판을 들어주기고 했고(안 해본 일이라 허리가 나갈 정도의 고통), 가을에는 무거운 쌀포대를 옮기기도 했다.






평생 농사를 짓던 아빠는, 7년 전 아빠의 허리가 파업을 선언함으로써 끝이 났다. 평생 쌀포대를 이고 지고, 무거운 농약줄을 끌고, 모판을 들고 했고 했던 허리가 더 이상 견딜 수 없게 된 것이다. 겨울에서 봄 사이 허리디스크 수술을 하신 아빠는 그 해부터 농사일을 내려놓으셨다. 누군가에게 논을 임대를 하기도 했고, 정부에서 운영하는 뭔가에 맡기신 것도 같았다.


"아빠, 저렇게 수북한 들판 보면 농사짓고 싶지 않아요?"


"아니, 난 농사라면 진짜 넌덜머리가 나. 일이라면 어릴 적부터 얼마나 했는지 다시는 하고 싶지 않아."


친정에 가면 아빠와 한다. 도시와는 달리 공원 따위가 없어 그냥 쭉쭉 뻗은 들판을 걷는 게 산책이고 운동이다. 걷다가 숨을 고르며 넓은 들판에 오랫동안 눈길을 주시기에 물어봤는데 농사는 절대 싫단다.


나와 남매들이 말하는 아빠는 태생이 노래하는 배짱이었다. 노래하시는 건 보지 못했지만 뜨거운 여름날 한낮, 더위를 피해 전축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들으며 낮잠을 청하시는 모습. 그게 딱 아빠가 원했던 삶이었던 것 같다. 그런 아빠에게 '첫째 같은(일할 때나 책임질 때만)' 둘째 아들의 짐을 지워 그 많은 땅에 농사를 짓게 하신 할아버지가 얼마나 무섭고 원망스러웠을까.


"어릴 때 이 길로 쭈욱 따라가 옆옆 동네로 가서 일손을 거들다 보면 큰아버지가 버스에서 내렸거든. 그러면 그때서야 큰아버지랑 집에 갈 수 있었지. 그렇게도 일을 많이 했다 내가."


옅은 치매를 앓으시는 아빠는, 이제 자꾸 옛 기억을 얘기하신다. 베트남 파병 다녀온 걸 등록해서 자식들 학교에서 나오는 거라도 지원받자고 성화였던 엄마의 말씀에도 꿈쩍도 하지 않으셨던 아빠는, 이제 베트남 이야기를 하신다.

아빠의 직업은 농부. 농사짓는 모습을 당연하게 여겼는데 어릴 적 아빠는 버스에서 내리는 큰아버지를 보며 당신도 학교에 다니고 싶었던 게 아닐까. 그렇게 농사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으셨을지 뒤늦게야 어린 아빠의 시선을 따라가 본다.



우리 논이었돈 드넓은 저 땅은 이제 다른 사람이 농사를 짓는다


어릴 적부터 농사일을 너무나 많이 했다고 불만이 가득했다. 하지만 아빠가 좋든 싫든 지어야 했던 농사일이 있었기에 우리는 단 한 끼도 굶지 않을 수 있었다.

오로지 굶지 않는 일에 집중하시느라 낭만적인 부모는 되지 못했지만 우리는 하얀 쌀밥, 때때마다 햅쌀로 밥을 먹었다.


여전히 봄엔 이양기, 가을엔 콤바인에 올라 위풍당당 개선장군처럼 논바닥을 휘젓고 다니시는 아빠의 모습이 선하다. 무르익는 벼처럼 이제 우리 아빠도 기울었다.

농사일을 거드는 건 그렇게도 싫었는데, 어쩐지 아빠의 당당하던 그 모습은 매년매년 더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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