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하도록 길어지는 늦더위의 꼬랑지를 잡고 따라온 것은 가을비다. 한여름 소나기가 퍼붓듯 세찬 비가, 장마철이라도 되는 듯 하루종일 꽤 많은 양의 비가 쏟아진 10월 중순.
이 비가 그치면 가을도 아닌 초겨울로 훌쩍 점프하겠지.
"올해는 엄청 춥다니까 11월 말에나 김장을 해얄까 보다."
엄마와의 통화다. '해얄까 보다'라고 말씀하시지만 그 말속에는 '해야한다, 그러니 날 맞춰서 내려와라'라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찬바람 불기 시작,
바야흐로 김장의 계절이 다가오는 것이다.
작년의 김장날 우리 가족의 모습, 해마다 이 날에는 해가 뜨기도 전부터 김장 준비를 시작한다
친정은 김치 공장은 아니다.
그러나 1년에 한 번 김장을 하는 날이면, 마치 김치공장을 방불케 하는 스케일에, 걱정부터 앞서는 것도 사실.
(그래봤자 나는 1박 2일 심부름하고 뒷정리하는 게 다인데)
친정의 김장은 어느 하나 사는 재료 없이 모두 엄마, 아빠가 농사짓고 준비한 것들로 만들어진다.
봄부터 순차적으로 때에 맞춰 씨를 뿌려 키우고 거둔 마늘, 생강, 당근, 양파를 비롯해 늦여름부터 본격적으로 준비한 배추와 무, 대파, 파... 어쩌면 일주일 동안이 아닌, 1년 내내 김장 준비를 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장을 하는 날은 잔칫집이나 다름없을 정도로 온 집안이 시끌시끌하다. 한여름 일주일 간격의 엄마아빠 생신 때에도 형제들끼리 나눠 부모님을 뵈러 가는지라 한 번에 다 모이기가 좀처럼 쉽지 않다. 명절도 아닌 이날만큼은 모두가 친정으로 출동! 각각의 위치에서 역할 분담을 받은 일꾼의 몫을 해내야 한다.
작년엔 오빠가 김장 당일에 몽골 출장이 잡히는 바람에 며칠 먼저 가서 배추를 뽑고 옮겨서 절이는 작업을 했다. 사실 김장하는 당일보다 소금에 배추 절이는 작업이 훨씬 더 고되다는 걸 충분히 알고 있다.
몇 시간마다 소금물에 담가진 배추를 꺼내 물을 빼는 작업은 매우 중요하다. 푹 절이면 배추가 너덜너덜 녹아버리고, 너무 덜 절이면 팔팔하게 산 배추를 맛봐야 한다. 맛도 맛인데 그걸 큰 통에 넣었다 뺐다 하다 보면 허리가 끊어질 것 같은 고통을 느껴야만 한다.
"아이고 허리야."
절로 나오는 신음 소리.
그러니 오빠는 오빠 몫을 충분히 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절인 배추를 꺼내고 나면 배추 준비는 끝.
이때부터 양념준비가 시작된다. 금요일 퇴근 후 후다닥 내려가면 도착한 순서대로 칼과 도마를 챙겨 들고 자리 잡고 앉는다. 그리고 시작되는 양파, 당근, 무, 대파 썰기. 집에 있는 도마와 칼이 총출동하여 식구대로 써는데도, 어마어마한 양 때문에 늦은 밤에야 마무리를 짓는다.
그렇게 늦게까지 준비하고 잠들어도, 김장하는 날엔 꼭두새벽같이 눈을 떠야 한다. 품앗이하는 동네 아주머니, 할머니들은 얼마나 바지런하신지 해가 뜨기도 전에, 그리고 아침밥을 먹기도 전에 절인 배추가 쌓인 비닐하우스 안에 자리 잡기 시작하니 말이다.
"엄마, 그냥 김장 양을 줄이고 우리 식구끼리 하면 안 돼요?
이렇게 할머니, 아주머니들 시중드는 게 더 힘들어요."
해마다 반복되는 자식들의 볼멘소리.
예전 800 포기 김장하던 시절에 비하면 이제 300 포기 미만이니 숨 쉴만도 하지만, 사람은 어쩔 수 없이 현재가 가장 힘들다.
(800 포기... 절임배추로 판매도 하던 시절)
"할매들이 농사도 못 짓는데 따로 김장을 할 수 있겠냐.
이렇게 일손 돕고 가져가시는 걸로 한 해 겨울 나는 거지."
친정집과 5남매의 몫이라면 300포기씩이나, 그렇게 많지 않을 것이다. 아픈 누구한테, 누구네는 해줄 사람이 없어서, 예전에 도움받아서, 당숙모네는 당연히 보내드려야지 하는 다양한 이유로 택배로 보내지는 양도 상당하다.
뿐만 아니라 김장 품앗이뿐만 아니라, 김장 후에 온 동네를 돌아다니며 대여섯 포기씩 들어있는 김장을 나누다 보면 과연 우리 집 김장을 했나, 동네김장을 했나 싶다.
전용 삽으로 양념을 버무리고 있는 신랑, 허리 무지 아프단다
김장날 바쁜 이유는 또 있다.
손으로 버무릴 수 없는 양의 양념을 아주머니들이 오시기 전에 간을 맞춰놔야 하기 때문이다. 김장과 메주 쑬 때 사용하는 전용삽이 등장하는 순간이다.
고춧가루, 새우젓, 마늘, 생강, 참깨, 양파즙, 쌀죽 등을 넣어 어느 한 곳 뭉침 없이 잘 저어준다. 저어준다라고 하지만, 그 양이 많고 많아서 서너 번 하다 보면 기진맥진. 어릴 적엔 아빠 몫이었던 그 삽자루는 이제 오빠와 신랑의 손에 번갈아 쥐어진다.
"배추를 잘 절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 양념맛에 따라 일 년 김치 맛이 결정된다잉."
중요하다는 의미 반, 겁 주기 반.
한 번에 딱 알맞은 맛이 나면 다행이련만 다 젓고 나서 간을 보면 좀 싱겁거나 짜서 다른 걸 또 추가해야 하는 게 문제. 그러면 또 젓기의 작업이 시작되니 진짜 허리가 끊어질라 한다는 말을 체감할 수 있다.
(이미지 출처 : Pixabay)
드디어 시작된 김장 버무리기.
어른들의 손은 빠르다, 빨라도 너무 빠르다.
각각의 위치에 양념을 한 바가지씩, 김치통도 하나씩, 그리고 절인 배추를 배달하기 시작하는데 쉴 새 없이 말씀하시는 가운데 어쩜 그리 손은 빠른지.
온 동네의 소문은 이렇게 모여서 일하는 가운데 생겨나고 퍼져나가는 듯하다. 사투리가 섞인 말씀들은 재미진 것은 물론 찰지고 능청스럽기 이루 말할 수 없다. 어느새 자꾸만 귀를 기울여 아주머니들의 대화를 듣게 되는데.
"아, 얼렁얼렁 배추를 갖다주니라!"
잠시라도 배추가 떨어지거나 다 담아진 김치통을 옮기지 않으면 불같이 성화다.
엄마는 아주머니들과 함께 김치를 버무리시고, 아빠는 배추의 꼭지를 따신다. 나와 신랑, 큰언니는 배추와 김치통, 양념을 제때 공급하거나 이동하는 역할을 했다.
온몸에 양념이 묻는 것은 당연하고, 아무리 비닐하우스 안이라고 하지만 추운 날씨에 물에 불은 손끝과 발은 동상이라도 걸릴 듯차가웠다.
(이미지 출처) Pixabay
비닐하우스에서 김장이 진행되고 있다면, 집에서는 작은언니가 일꾼들의 새참 준비가 한창이다. 시간에 따라 늦어지지 않도록 따뜻한 다방커피가 전해지고 이쁘게 깎은 과일들이 배달 온다.
김장이 거의 다 되어갈 즈음엔 김장하는 날의 별미인 수육과 맥주, 소주가 기세등등하게 등장! 불과 2~3시간 남짓 김장하는 동안 먹은 것만 봐도 배가 부를 것 같은데 그건 때거리(새참)이고, 김장 후엔 점심식사까지 뚝딱! 마쳐야 비로소 김장이 끝난 것이다.
그렇게 일찍 시작해서 그런지 딱 점심때 끝나는 걸 보면, 참... 배꼽시계 한번 정확하다 싶다.
바닥 물청소까지 마친 비닐하우스 안
품앗이 온 어른들은 김치를 다 버무린 후 식사를 하고 마무리를 하시지만, 형제들의 일은 여전히 산더미처럼 쌓여있다.
어른들이 각각 쓰신 그릇이나 양념통, 배춧잎이 흩날리는 바닥까지 물을 뿌려가며 빗자루로 씻어내고 나면 비로소 끝.
이때는 '아이고 나 죽겠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엄마, 허리, 다리 아프다고 말고 이제 농사 그만 지어요.”
“이 까짓게 무슨 농사라고.”
근래 들어 반복되는 부모님과 자식들 간의 대화다.
한창때에 비하면 논이며 밭의 평수는 확연히 줄었지만 엄마, 아빠의 체력도 줄어든 것도 사실. 그러나 엄마는 당신의 몸은 예전과 같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올여름, 생신 때 오랜만에 다 같이 모인 자리에서 엄마는 인공관절 수술을 한 무릎의 반대쪽이 아프다고 토로하셨다.
그에 쏟아진 자식들의 원성 때문에 모임 끝날 즈음엔 아프시다는 말을 쏘옥 숨기셨다.
비단 지금 벌려놓은 농사일 때문만은 아닐 텐데, 자식들은 엄마의 농사일이 탐탁지 않다. 아빠는 농사라면 질려버렸다며 허리 디스크 수술을 하시자마자 손에서 놓으셨지만, 엄마는 여기저기 흩어진 땅뙈기를 가만 놔두지 못하신다.
'이까짓게'라고 말씀하시지만 친정과 다섯 자녀의 가족, 그리고도 여기저기 퍼줄 수 있는 만큼이니 절대 적은 양의 농사일이 아니다.
엄마는 자꾸만 농사를 그만 지으라는 자식들에 서운하신 모양이다. 자식들은 가까이서 돌보지도 못하고 수술한다 해도 시원스럽게 낫지 않을 엄마의 다리와 허리가 여간 신경 쓰이는 게아니다.
그럼에도 매번 친정에 가면 이것저것 다 챙겨 들고 오는 나는 유죄다. 딸은 도둑년이라는 사실을 부인하지 못한다. 나는 엄마의 허리와 다리를 걱정하면서도, 엄마가 김장을 하지 않으시면 일 년의 김치를 어쩌지 하는 이기적인 걱정을 한다.
"엄마 살아있을 때나 갖다 먹는 거지."
엄마는 내 속내를 꿰뚫고 있는 듯하다.
또다시 대환장파티가 다가오고 있다.
올해는 얼마나 추울지, 얼마나 많은 김장거리가 기다리고 있을지 가늠할 수 없다. 이 대환장파티라도 해야 온 가족이 한 번에 모일 수 있는 시간이기도 하니 1년에 한 번은 기꺼이 동참하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