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언가 빠져들게 하는 무서운 힘
나의 어린 시절은 중독으로 가득 차 있었다.
중독의 시간들은 내 미래를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이 글은 불편한 사람, 불편한 것들에 대해 이제껏 알고 있던 상식을 뒤집는 시간을 만들 것이다. 모두 읽고 나면 기존에 알고 있던 생각이 바뀌어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남들이 가지지 못하는 나만의 묵직한 무기를 찾아갈 수 있을 것이다.
불편한 중독으로 나를 죽일 것인가? VS 불편한 중독을 나를 키우는 힘으로 만들 것인가?
살면서 겪었던 불편한 시간들을 담아본다.
아무도 겪지 않을 수도 있지만,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인생의 어떤 시기로 잠시 들어가 본다.
어린 시절의 나의 세계는 방구석이었다. 방문을 잠그고 세상과 단절하고 나만의 세상을 만들었다. 부모님이 문을 부수고 없앨 정도로 그렇게 나는 문을 닫고 깊은 무언가에 빠졌다. 대체 무엇에 빠졌던 걸까?
만화에 빠졌다. 매일 만화를 보고, 친척집을 갈 때도, 고깃집을 갈 때도 만화책을 들고 다녔다. 방학이면 더없이 설렜다. 하루 온종일 만화를 볼 수 있어서. 매일 만화 속 상상에 들어가서 살고, 만화 속 캐릭터들로 머릿속을 채우며 살았다. 어린 나는 만화 중독자였다. 지독하게 만화를 찾고, 만화를 손에 붙이고 살았다. 언제 어디를 가도 만화를 손에 쥐고 다녔다. 그러다 만화의 중독을 빼앗아간 한 가지가 있었다.
그것은 게임이라는 또 다른 세계의 중독이었다. 게임의 세계는 만화만큼 강력했다. 하나씩 레벨업을 하고, 실력이 자라나고, 그 안에서 받는 인정이 나의 세계였다. 혼자서 그렇게 방에서 노는 것이 좋았다. 때로는 만화 속 세상에, 때로는 게임 속 세상에 빠져 그렇게 어린 시절을 보냈다. 학교를 가지 않을 때, 하루 많을 때는 자는 시간을 제하고 16시간을 넘게 게임과 만화로 놀았으니 그야말로 혼자 노는 것의 중독자였다. 혼자 노는 대상은 조금씩 바뀌어갔다. 음악에 빠져서 라디오를 들으며 음악을 채우고 수집하고, TV에 빠져 편성표를 외우며 프로그램들을 모조리 챙겨본다. 하루 한 편의 영화를 보며 몰랐던 세상을 만난다. 한번 무언가에 푹 빠지는 것에 맛을 들이고 나니, 그 대상을 바꾸는 것은 어렵지 않다. 이것이 어린 시절의 모습이었고, 나를 둘러싼 세계는 더없이 행복한 환상의 세계였다.
그러나 그것이 부모님에게는 불편한 세계였다. 아이가 무엇을 하는지 알 수 없고, 세상밖으로 나오지 않으니 더없이 불편했다. 하루는 방문을 없애버렸다. 언제나 머물고 있는 불편한 방, 불편한 세상으로부터 아이를 꺼내기 위해서. 아이의 중독은 멈췄을까? 방 입구를 큰 천으로 덮고 계속 환상의 세계를 이어나갔다.
그러다 혼자 노는 형태가 진화를 한다. 게임에, 만화에 중독되어 그 세계에 머무니 새로운 것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 세계를 만드는 것에 대한 호기심이 생겨나고, 보는 넘어 직접 만들어보기 시작했다. 나만의 상상을 스토리로 만들고 캐릭터를 그려 만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게임은? 게임은 만들기가 어려웠다. 대신 좋아하는 캐릭터와 게임들로 보드게임을 만들기 시작했다. 주사위를 던지며 놀 수 있는 간단한 놀이들을. 그것은 나의 신세계였다. 그림을 그리고, 이야기를 만들고, 게임판을 만드는 그 시간 동안 나는 나의 세계를 만드는 놀이에 흠뻑 빠져 있었다. 그것은 보는 중독을 넘어선 더 강력한 중독이었다.
그렇게 그린 만화의 독자는 학교의 같은 반 몇몇의 아이들이었고, 보드게임의 유저는 한 명이 친척동생이었다. 서너 명의 독자가 보는 만화를 위해 잠들기 전까지 그리고, 한 명의 유저가 즐기는 게임을 위해 방학의 모든 시간을 쏟았다. 새로운 것을 만들어 그 안에 들어가 노는 것은 살면서 맛볼 수 없던 기분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작은 독자와 유저가 있는 세계였지만 그때만큼은 나만의 세계를 가진 존재였다. 보는 것과 만드는 것은 또 다른 중독의 맛이었다. 그런데 그걸 왜 세상에 더 꺼내지는 않았던 걸까?
나의 세계를 불편해하는 사람이 있었다. 만화를 그리는 재미에 푹 빠져 누군가에게 보이고 싶은 마음이 든다. 한컷 한 컷씩 그려서 그 당시 많이들 찾던 학교의 모임 커뮤니티에 올리기 시작한다. 방학 동안 연이어 만화를 올리고 조금씩 반응을 살핀다. 온라인이라는 공간에는 처음 꺼내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방학이 끝나고 나서 학교를 갔더니 모르는 누군가가 찾아왔다. 그리고 나는 맞아야 했다. 신성한 커뮤니티에 만화 따위를 올렸다는 이유로. 나는 나댄 존재가 되었고, 그렇게 불편한 사람으로부터 나의 세계를 감춰야 했다. 나의 작품이 누군가에겐 쓰레기였고, 나의 즐거움이 누군가에겐 불편함이었다. 세상의 양면성을 처음 알게 된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 사건조차도 나의 세계를 부수지 못했다. 종이와 펜은 여전히 세계를 만드는 장치였고, 나의 유일한 몇 안 되는 독자와 유저만으로도 나의 세계의 존재는 충분했다.
그리고 대학생이 되었다. 대학교에 갔더니 모든 것들이 다 처음 만나는 세계였다. 만화 속 캐릭터처럼 사람들은 다들 개성이 있었고, 게임 속 마을처럼 학교라는 곳은 다양한 것들이 존재했다. 나는 캠퍼스라는 새로운 게임을 시작했다. 대학생활이라는 나의 현실 만화를 그려가기 시작했다. 만화와 게임이 알려준 것들은 나를 세상밖으로 꺼내주는데 무기가 되었다. 술자리를 가지거나 대화를 할 때 어릴 적 봐온 수많은 영화와 만화는 대화의 원천이 되었고 다양한 이야기를 펼칠 수 있었다. 만화, 게임, TV 프로그램, 음악. 모두가 어린 시절 빠져들었던 것들이었고, 대화의 무기였다. 그렇게 세상에 꺼내져 어린 시절의 무기로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성장을 한다. 점점 더 혼자 노는 시간보다 바깥에서 머무는 시간이 더 많아지기 시작한다.
그러나 내면에 여전히 만화 중독자의 자아가 있었다. 바깥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만화로 그려 온라인 커뮤니티에 올리기 시작한다. 때로는 좋은 반응을 얻기도 하고, 때로는 악플이 찾아들지만 어릴 때와 다르게 버틸 수 있다. 만화를 그리다 현실 세계에서 맞아본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악플은 현실의 아픔을 넘어서지 못한다. 나의 불편했던 과거는 나를 더 강하게 만들어주었다. 그렇게 두려움을 딛고, 내가 만든 세계를 비로소 세상에 꺼내는 용기를 갖게 된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사회라는 세계로 나아간다. 가게 된 곳은 어디였을까? 그곳은 영화와 음악과 TV와 게임을 만드는 곳이었다. 어릴 적 즐기고 중독되었던 놀이들을 콘텐츠라는 이름으로 사업을 하는 곳이었고, 그곳에서 일이라는 세계를 처음으로 펼치게 되었다. 나에게 놀이였던 것이 일이 되었다. 그렇게 십 년이라는 시간이 지나도록 언제나 나의 일은 캐릭터와, 음악과 함께해 왔다. 일이라는 세계는 또 다른 세계지만, 어린 시절 그리던 세계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상상하고 그리고 만들어가는 일이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고 나니 나는 놀이처럼 일의 이야기를 그리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누군가를 불편하게 했던 중독의 여정이 어른의 나를 만들어주었다. 나는 어린 시절 나의 상상의 세계를 만들어왔고 어른이 되어서도 같은 것을 할 수 있었다. 세상은 그것을 브랜드라고 부르고, 세계관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어른이 되어서도 여전히 브랜드를 만들고 그릴 때 어린 시절을 떠올린다. 그 당시 세상의 한 명뿐이었던 고객을 위해 온 시간을 쏟았던 것처럼 한다면 무슨 일이라도 해낼 수 있다고.
그렇게 다음에 만들 세계를 그리며 다시 어린 시절의 나를 꺼낸다. 그리고 문이 떼어진 방에 덩그러니 있는, 만화를 그리다가 맞은 어린 나를 마주하고 이렇게 이야기한다. 너의 중독이 지금의 나를 만들 수 있었다고. 마음이 행복하다면, 더 빠져들어도 괜찮다고. 상상을 키울 수 있다면 불편한 작은 것들은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다고.
나의 중독은 나의 무기가 되었다.
애초부터 모든 것을 계획하고 자라 온 것은 아니었다. 어린 시절과 지금의 나를 잇는 2개의 전환점이 있었다. 단순히 즐기는 것을 넘어 직접 창작하고 만들려고 했던 순간부터 나만의 이야기를 만들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세상에 꺼낼 수 있는 용기를 가질 때 또 하나의 성장을 할 수 있었다. 방 안에 머물러도 괜찮다. 때론 현실세계와 단절되어도 괜찮다. 다만 그것이 나를 해치거나, 나를 죽이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나의 이야기를 만들고, 나를 세상에 꺼낼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그것이 중독의 힘을 꺼내 활용할 수 있는, 내 어린 중독자가 알려준 이야기다.
그대는 지금 불편한 중독 속에 빠져 있는가.
그렇다면
불편한 중독은 나를 키우는 강력한 힘이 될 수 있을까?
불편한 중독은 나를 해치고 있는 치명적인 파괴물일까?
그러면 그것을 가지고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 김영하
불편하다는 것은 남들이 갖지 못하는 것을 갖는 시간이 되기도 한다.
총 10개의 글에 걸쳐 불편한 이야기, 불편한 감정, 불편한 사람에 대한 나의 과거와 진실을 꺼내보려 한다. 불편한 글 속에 당신과 세상의 변화를 만들 수 있는 힘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불편한 사람> ep.5
초인
이 시리즈를 통해 아래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아가실 수 있습니다. 이 답을 찾아서 나를 세상에 던지는 무기로 활용하고 싶다면, <불편한 사람> 시리즈와 함께하시길 바랍니다.
나는 불편한 사람인가요?
불편한 사람은 안 좋은 걸까요?
불편한 사람은 어떤 의미를 가지게 될까요?
불편한 사람은 어떤 세상을 만들어 갈까요?
나는 어떤 세상을 만들어 갈까요?
<불편한 사람> 프롤로그
<불편한 사람> ep1 세상은 나에게 불편한 세계를 선물해 주었다
<불편한 사람> ep2 새로운 세계는 불편한 세계였다
<불편한 사람> ep3 실패로부터 살아남는 불편한 방법
<불편한 사람> ep4 마음이 죽었을 때 살리는 불편한 방법
<불편한 사람> ep 6 불편한 열등감이 끓어오를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