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한 열등감이 끓어오를 때
나의 과거는 열등감에 휩싸여 있었다.
열등감을 안고 나는 불편한 감정에 던져졌다.
이 글은 불편한 사람, 불편한 것들에 대해 이제껏 알고 있던 상식을 뒤집는 시간을 만들 것이다. 모두 읽고 나면 기존에 알고 있던 생각이 바뀌어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남들이 가지지 못하는 나만의 묵직한 무기를 찾아갈 수 있을 것이다.
불편한 열등감으로 나를 가둘 것인가 VS 나를 세상에 꺼낼 것인가?
살면서 겪었던 불편한 시간들을 담아본다.
아무도 겪지 않을 수도 있지만,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은밀한 감정 속으로 잠시 들어가 본다.
열아홉 소년, 비빔밥 집에서 소용돌이와 같은 사건을 맞이하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수능이 끝나고 비빔밥 집을 찾았다. 졸업 전까지 남는 시간을 활용해 아르바이트를 하기로 한 것. 집 근처에 위치한 비빔밥집이 오가며 일을 하기에 제격이었다. 그 당시 한 시간에 2500원을 받기로 하였다. 최초시급이 3000원이었지만 그 당시 고등학생은 최저시급보다 적게 받는 것이 관례인 시대였다. 불편한 가격이었지만, 가깝기도 했고 일도 크게 어렵지 않아 마음은 크게 불편하지 않았다.
학교에서 조기 수업을 마치고 나면 비빔밥집을 향했다. 잠깐의 일들은 했었지만 어딘가에 속해서 정기적으로 일을 해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사회생활을 미리 해보는 기분도 들었다. 비록 한 시간에 2500원, 4시간에 1만 원을 받는 것이었지만 새로운 세계가 나쁘지 않았고 만족스러웠다. 그것이 열아홉의 모습이었다. 하루는 새로운 알바생이 들어온다. 자그마한 체구에 나이는 비슷하거나 조금 더 많아 보인다. 알고 보니 비빔밥 집 사장분의 친척이었다. 방학을 맞아 용돈벌이를 하러 함께 일을 하게 된 것이었다.
그 알바생과 나 모두 내적 성향을 가지고 있었기에 별 말을 나눌 일은 없었다. 서로 필요한 말을 하는 사이, 그걸로 충분했다. 나는 4시간을 일하고 1만 원을 벌어가는 것.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런데 그런 잔잔한 일상에 소용돌이가 휘몰아친 한 강렬한 사건이 일어난다. 무슨 일이었을까?
손님이 없는 시간. 사장분과 알바생의 대화를 듣게 된다. 들으려 한 것은 아니었지만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자연스럽게 정리를 하며 듣게 된다. 그 대화의 한 단어는 나를 어지러움에 빠뜨린다.
"시급 5000원이 부족하진 않지? 아버님은 잘 계시고?"
"네 그럼요. 감사하죠. 잘 계셔요."
'.....?'
나와 같은 일을 하며, 하물며 늦게 들어온 알바생2는 5000원을 받고 있었다. 먼저 들어온 알바생1은 2500원을 받고 있었다. 그건 나였다. 2배. 5000원이라는 금액과 2500원이라는 금액만 놓고보면 큰 차이가 아니어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당시 나에게는 나는 옆에 있는 누군가의 절반의 존재였던 것이고, 옆에 있는 누군가는 나의 두 배인 존재였다. 충격에 휩싸였고, 당혹스러운 표정을 감출 수 없었다. 그리고 곰곰이 생각을 한다. 나는 2500원에 하기로 한 것이니, 딱히 할 말은 없다. 그런데 왜 같은 일을 하고 누구는 5000원, 누구는 2500원을 받아야 하는 걸까? 나는 이후에 반값의 존재였고, 티는 내지 않았지만 항상 불만이 가득 담겨 있었다. 사장분에게, 그리고 알바생2에게도. 대놓고 올려달라고 이야기를 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열아홉의 나는 나의 이야기를 쉽게 꺼내지 못하는 그런 내적 자아를 가지고 있었다.
그렇게 시간을 조금 더 보낸 후, 예정되었던 기한보다 빠르게 알바의 끝을 맺는다. 입학을 준비해야 한다는 이유로. 하지만 마음 한편에 절반의 돈을 받고 일을 했다는 사실은, 마음속 미움으로 남아 있었다. 물론 내색이나 말 한마디 하지 못 한채. 나중에 알았는데 그때 느꼈던 감정은 '열등감'이라는 것이었다. 공부나 다른 것에서 크게 느껴보지 못했던 열등감을 비빔밥집에서 느끼게 된다. 그것이 열아홉에 맞이한 첫 사회의 이야기였다.
그리고 대학생이 되고 또 다른 알바를 시작한다. 호텔에서 부페를 정리하는 일이었다. 당시 3800원을 받았다. 최저시급이 3500원 정도였으니 그보다 조금 더 높은 정도 수준이었다. 과거에 2500원, 지금은 3800원. 많은 상승이 있었다. 일은 괜찮았다. 학교를 다니면서 주말에 할 수 있었을뿐더러 이따금씩 남은 부페를 먹는 소소한 행복까지 있어 나쁘지 않았다. 스무 살의 나는 열아홉의 나와는 조금 달랐다. 새로운 캐릭터를 갖고 싶었고 애써 외향적인 노력을 하니 어쨌든 전보다 밝은 모습을 가질 수 있었다. 함께 일하는 사람들도 잘 맞고, 그렇게 몇 달의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엄청난 소식이 전해 든다. 시급을 올려주기로 한 것. 무려 4500원으로의 상승이었다. 그때 잠시 구름에 붕 뜬 기분이었다. 2500원을 받던 나에서 1년 만에 4500원을 받는 사람이 된 것이다. 물론 시작은 절반짜리 사람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그 기분은 잊혀 갔다. 그 상승은 에너지의 원동력이 되었고 더 씩씩하게 일을 해나갔다. 어느새 안에서 제법 고참인 알바생이 되어 있었고, 어느 정규직보다 더 오래된 시간을 갖게 되었다. 세상은 그걸 '짬'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연이어 기적과 같은 일이 일어난다.
시급이 5000원이 된 것. 5000원은 나에게 상징과도 같은 어떤 의미가 아니던가? 2년 만에 그렇게 반쪽의 자아를 잊고 자아를 회복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런 말도 함께 이어졌다. 다른 사람은 4500원을 받으니까 절대 이야기하지 말라고. 그 말은 마음에 강렬하게 남았다. 세상은 4500이고 나는 5000이었다. 이전에 그 반대였다면 이제 나는 세상보다 위에 있다. 그것이 열등감의 반대말로 '우월감'이란 감정이란 것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시간이 지나서 생각해 보니, 열등감이란 감정은 결과적으로 좋은 결과를 만들어주었다. 처음 2500원에 만족하고 그렇게 지냈다면 아무 일이 없었을 것이다. 예정대로 기간을 꽉 채우고 그렇게 잊혀졌을 수도 있다. 그런데 바로 옆 누군가의 5000원의 절반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나는 반쪽짜리 사람이 된 기분이 들었고 그때부터 언젠가 5000짜리 되리라 마음 한편에 자리 잡았던 것 같다. 그리고 다음 세계에서는 그걸 향해서 에너지를 태워서 인정이라는 것과 5000이라는 타이틀을 갖게 된 것이다.
그런데 아마도, 5000이라는 숫자를 가졌을 때 다른 누군가가 6000이라는 숫자를 들었다면 또다시 상실감에 빠졌을 수도 있다. 그런데 되려 다른 이들은 4500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마음속 특별한 감정이 드는 것은 나는 결국 '열등감'과 '우월감'이라는 감정에 놀아나는 불완전한 존재라는 것을 이야기한다. 그건 유치하고 큰 의미 없는 기분이나 감정일 수 있다. 하지만, 때로는 열등감은 더 높은 세계에 도달하기 위해 더 치열하게 나아가서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필요한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또 우월감은 그런 시간 이후에 갖게 되는 보상, 다른 말로 정신승리로 자존감을 높이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이렇게 열등감과 우월감이 나라는 존재를 보다 더 나은 존재로 만드는데 무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비빔밥집에서 호텔에서, 세상은 그걸 나에게 알려주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어른이 되고 진짜 사회라는 세계로 나아간다. 그때부터가 진짜였다. 열등감의 반복이었다. 하지만 내색은 할 수 없다. 그것이 사회라는 장치가 만들어놓은 규칙이니까. 옆에 있는 누군가가 인정을 받는 동안 나는 보통 사람이었고, 때로는 보통 사람보다 못했고, 아주 가끔은 보통 사람 이상이 되기도 했다. 그 시간 동안 누군가를 보며 계속 알게 모를 열등감을 가졌다. 그리고 그걸 패배감이 아닌, 정신승리로 무장을 한다. 개개인들이 나를 제대로 보지 못하는 거라고. 이 시대가 나를 보게 될 거라고. 누군가는 말한다. 때론 정신승리가 버팀의 무기가 되고, 다음으로 나아갈 수 있는 힘이 된다고.
열등감을 마주했을 때 패배감에 물들고, 자아를 지키지 못했다면 괴로움에 빠졌을 수도 있다. 2500에서 5000까지 2년의 시간에 걸쳐 닿았던 것처럼, 느렸지만 나는 계속 닿을 것이고 시간이 지나서는 남들이 닿지 못할 영역에 초월해서 가 있을 거라고 상상했다. 미래의 상상 속 우월감을 끄집어 와서 지금의 열등감을 식히는 방식이었다. 그리고 망상에 그치지 않고 실제로 상상을 실현시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더 나은 내가 되기 위해 매일을 고민하고 하나씩 쌓으며.
그로부터 10년이 지났다. 그때 상상한 내가 지금 이 순간 글을 쓰고 있다. 지금의 나는 과거에 상상했던 나였을까? 내가 그려오던 모습일까? 그건 모르겠지만 지금은 그때처럼 열등감에 마음이 불편하지 않다. 이제는 안다. 무언가에 대해, 누군가에게 열등감을 느낀다는 것은 그 누군가에 닿고자, 무언가를 갖고자 갈망하는 것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갈망을 얻기 위해 열등감을 무기로 휘두를 수 있는 나 자신을 마주한다. 나는 어제도 오늘도 나보다 더 뛰어난 사람들을 보며 열등감을 갖는다. 그리고 상상한다. 훌쩍 더 성장해 그들의 옆에 서있는, 아니 더 나아가서 커져있는 나 자신을. 그 순간 열등감이 우월감으로 물든다. 그리고 그 감정들은 오늘의 나를 쏟아내는 동력이 된다.
열등감은 나의 무기가 되었다.
열등감을 불편한 감정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 불편한 감정을 불만과 부정적인 말과 행동으로 쏟아내고 끝나면 열등감에 잡아먹히는 행위일 뿐이다. 반대로 그 열등감을 마주하고 갖고자 하는 것, 닿고자 하는 것, 가지지 못한 것을 바라보고 나아가면 엄청난 무기가 될 수도 있다. 세상의 수많은 1인자와 2인자의 싸움, 최초의 자리를 가지기 위해 경쟁하는 역사의 순간들은 모두 열등감과 시기심, 질투심에서 비롯되었다. 열등감은 질투심과도 같다. 그 질투심으로 검은 감정이 아니라, 활활 타오르는 마음을 만들어 나를 밝히는 무기로 만든다면 미래의 우월감을 꺼내와 나를 훌쩍 키워낼 수 있을 것이다.
그대는 지금 불편한 열등감 속에 물들어 있는가.
그렇다면
나를 세상에 꺼내는 불편한 질투심일까?
나를 어둡게 만드는 불편한 시기심일까?
자, 무엇을 선택하겠는가.
그들과 경쟁하지 말라.
초월하라. 나 자신을.
그들은 저 멀리서 거인의 나를 바라볼 것이다.
초인
불편하다는 것은 남들을 뛰어넘으려는 의지의 원천이기도 하다.
총 10개의 글에 걸쳐 불편한 이야기, 불편한 감정, 불편한 사람에 대한 나의 과거와 진실을 꺼내보려 한다. 불편한 글 속에 당신과 세상의 변화를 만들 수 있는 힘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불편한 사람> ep.6
초인
이 시리즈를 통해 아래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아가실 수 있습니다. 이 답을 찾아서 나를 세상에 던지는 무기로 활용하고 싶다면, <불편한 사람> 시리즈와 함께하시길 바랍니다.
나는 불편한 사람인가요?
불편한 사람은 안 좋은 걸까요?
불편한 사람은 어떤 의미를 가지게 될까요?
불편한 사람은 어떤 세상을 만들어 갈까요?
나는 어떤 세상을 만들어 갈까요?
<불편한 사람> 프롤로그
<불편한 사람> ep1 세상은 나에게 불편한 세계를 선물해 주었다
<불편한 사람> ep2 새로운 세계는 불편한 세계였다
<불편한 사람> ep3 실패로부터 살아남는 불편한 방법
<불편한 사람> ep4 마음이 죽었을 때 살리는 불편한 방법
<불편한 사람> ep5 나를 잡아먹는 불편한 중독들
<불편한 사람> ep.6 불편한 열등감이 끓어오를 때
<불편한 사람> ep7 번아웃이라는 괴물로부터 살아남는 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