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내 몸에서 일어난 이별
시험관 1차 이식과 3차 이식 때 나는 임신에 성공했다.
첫 시술에서 임신이라니...
마치 로또라도 맞은 기분이었다.
하나밖에 채취되지 않은 난자가 수정되어 이식되었고, 피검 수치는 78.
기대하지 않았기에, 오히려 믿기지 않았다.
피검 수치는 100 이상을 안정권이라 말하지만,
수치가 이틀마다 두 배씩 오르면 괜찮다고했다.
나는 단순히, 피검에서 수치가 뜨면 그게 ‘임신의 시작’이고, 곧 출산으로 이어지는 줄만 알았다.
아무것도 몰랐던, 무지했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피검 수치는 매번 조금씩만 오르더니,
결국 의사는 ‘화학적 유산’이라 말했다.
아기집조차 보지 못한 채, 첫 임신은 그렇게 끝났다.
이상하게도 그땐 실망보다는 희망이 앞섰다.
“그래도 임신이 되긴 되는구나.” 가능성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정말 나를 무너뜨린 건 두 번째 임신이었다.
44살, 두 번째 임신은 나에게 훨씬 큰 상처로 남았다.
두 번째 이식은 미착상으로 실패했고, 석 달 동안 몸을 쉬며 한약을 복용하고, 매일 만보를 걷고, 요가로 몸을 다스렸다.
그 모든 준비 끝에 세 번째 이식을 했다. 그때 4개의 난자가 보였고, 3개를 채취해 2개를 수정, 이식했다.
그중 하나가 착상되었고, 피검 수치는 148. 수치는 안정적으로 두 배씩 오르고, 아기집, 난황, 심장소리까지...모든 것이 교과서처럼 흘러갔다.
8주에 심장소리를 들으면 유산 확률이 낮다 해서, 양가에 알렸다. 그때는 그냥 자연스레 출산까지 갈꺼라는 생각을 너무나 당연하게 하고 있었다.
10주 차, 난임병원 마지막 진료를 앞두고 몸의 변화가 감지되었다. 며칠 전부터 속이 더부룩하던 느낌이 사라지고, 몸이 가볍고 개운했다.
그 말을 전하자 의사의 표정이 굳어졌다.
“초음파 한번 봅시다.”
의사는 한참을 들여다본다.
그리고 한동안 침묵이 흐른다.
그리고, 상상도 하지 못한 말이 이어졌다.
“찐스마일님... 잘못된 것 같습니다.
심장이 뛰질 않아요.”
염색체 이상으로 인한 계류유산.
그 순간, 귀가 먹먹해지고, 세상이 멈췄다.
무언가가 내 안에서 무너졌다.
말을 잃고, 감정이 끊어졌다.
소파 수술을 받고 집에 돌아온 나는, 그저 멍하게 하루를 보냈다.
그 이후, 세상은 조금씩 닫히기 시작했다.
두번째 임신 이후 3개월간 다시 한약을 먹으며 회복했다. 하지만 그 다음부터는 고단한 길이었다. 4번째 이식부터 11번째까지.
나는 다시는 피검 수치를 보지 못했다.
수정란이 착상되지 않았고, 임신은 되지 않았다.
모든 방법을 동원했다. 난소 PRP, 자궁 PRP, 한약, 침치료, 식단 조절, 운동, 영양제, 흑염소,
그리고 유명한 사찰에서의 기도,
답답한 마음에 점집과 사주까지…
의사도 바꿨고, 병원도 바꿨다.
하지만 결과는 늘 같았다. 수치는 ‘0’
두 번의 임신이 있었기에, 나는 쉽게 포기할 수 없었다. 왠지, 다시 될 것만 같았다.
그 즈음, 코로나19가 심각해지며 외출은 더 어려워졌고 나는 세상과 철저히 단절된 삶을 살았다.
20년 동안 강사와 상담사로 살아온,
사람과 말을 좋아하던 내가 입을 닫고,
마음을 닫고, 세상에서 한 걸음씩 멀어져갔다.
두 번의 임신과 유산.
그건 내 몸이 아니라 마음에 새겨진 깊은 상처였다.
그러나 그때는 몰랐다.
내 안에서 아주 조용히,
견디는 힘이 자라나고 있었단 걸.
그 시절의 나는 임신과 출산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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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이 넘어서도 나는 결혼과 출산을 꿈꾼다》
“그 나이에 무슨 결혼이야? 혼자가 편해.”
“아이도 이제는 어렵지 않겠어?”
“둘이 즐기고 재미나게 살아. 무자식이 상팔자야.”
그런 시선들 사이에서
제가 느낀 감정과 현실을 풀어보려 합니다.
다음 주 일요일 밤, 찾아뵐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