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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반지 Dec 18. 2021

김주무관이여 의심하고 의심해라.

40대 늦깎이 공무원의 슬기로운(?) 공직생활

나는 의심하지 않았다. 그게 나는 편했다. 나는 나만 봤다. 그렇게 해야만 덜 불행할 수 있었다. 남을 보기 시작하면 힘들어졌다.


아빠가 있는 친구를 보기 시작하면 불행했고

영하의 겨울 날씨에 보온 도시락을 싸오는 친구를 보기 시작하면 더 불행했고,

학비 걱정 없이 학교를 다니는 친구를 보기 시작하면 아주 비참해졌다.


모든 이가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나는 남을 일부러 보지 않았다. 자의로 그런 것도 있지만 나의 시간들은 늘 촉박했고 빽빽했기에 다른 이를 볼 수 없었다. 어린 시절 안정적인 울타리가 없었던 이들은 각자의 방식대로 스스로 울타리를 만들어갈 수밖에 없다. 나는 오로지 울타리를 만들 나무만 봤고 땅만 봤다.

의심할 여유도 없었고 시간도 없었다.


 


출처: pixabay


이런 김주무관이 기업지원팀에 발령을 받았다.

 

기업지원팀은 사업장과 근로자에게 지원금을 심사해서 지급하는 곳이다. 즉 돈을 주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보편적 의심'이 정서에 깔려 있어야만 사업장을 꼼꼼하게 조사할 수 있다. 처음엔 의심하지 않아도 꼼꼼하게 조사할 수 있다고 믿었다. 오히려 '사람을 믿어야 한다'라고 생각했다. 내가 배운 교과서에는 그렇게 적혀 있었던 거 같다.


선배 주무관님들이 "의심해라. 의심스러운데, 믿게? 나라면 의심스러워서 이거 저거 더 받아 놓겠다"라고 했을 때, '전 사람을 믿고 싶어요. 진심은 전달되는 거 아닐까요."라고 답했었다.


선배 주무관님들이 알 수 없는 미소를 보였지만 역시 난 또 나만 봤기에 우려의 목소리를 귓등을 스치는 바람으로 훅 보내버렸다.


하지만 김주무관은 한통의 전화를 받은 후, 자연스럽게 이런 소리(분명 말이 아니었음)를 냈다.

" 좀 더 의심했어야 했는데,....."


타 지역 고용센터 모성보호 담당자에게 전화가 왔다.

"주무관님이 처리한 000분 한부모 특례 적용을 했던데요.

 어제 한 남성분이 아내가 육아휴직급여를 받고 있는데 본인도 육아휴직 급여를 받을 수 있는지 조사하다가 아내분이 주무관님 센터에서 한부모로 특례 적용된 게 확인됐어요. "


"사실혼 관계인 듯한데, 부정으로 볼 지 부당으로 볼 지 조사해보셔야 할 듯해요."


바로 생각이 났다.

한부모, 즉 사별이나 이혼으로 한부모가 되신 분이다. 그래서 육아휴직급여 더 나간다. 이런 분들은 유난히 조심스럽게 처리하는데 특히 '저분'은 미혼모였다. 미혼모는 흔한 케이스는 아니었다. 그래서 두어 달 전 일임에도 또렷이 기억이 났다. '저분'의 목소리도 기억난다.


옆 주무관님이 "미혼모라 하고 사실혼인 경우가 꽤 있으니 서류를 꼼꼼히 받아 놔라. 참 그리고 본인이 사실혼이 아니다는 내용을 자필로 쓴 서류도 꼭 첨부하고"라고 했다.


서류를 추가할 때마다 굉장히 미안했다. 미안한 목소리로 전화를 했고 조금은 당황한 목소리로 답하시면서 서류들을 보내주셨다. '한부모로 양육을 하고 있다'는  자필 서류도 받았다. 그런데 또 '사실혼이 아니다'라는 내용을 자필로 써서 보내달라는 게 인간적으로 죄송스러웠다. 그래서 마지막 한 개의 서류는 요청하지 못했고 첨부하지 못했다.


그 순간 뒷목이 찌릿하면서 내 몸 어딘가에 '의심'이라는 부품이 한 개 추가되는 고통이 왔다. 인간 김 00이 아니라 고용센터 김주무관이 갖는 '의심'은 직업적으로 필요한 덕목이었다. 민원인과 나는 인간적인 정에 의해 만나고 헤어지는 것이 아니라 '돈'을 주제로 엮였다. '돈'을 '더' 받으려는 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것이다.  


우리가 주는 '돈'들은 내 세금뿐만 아니라 국민 모두의 세금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속이는 자들이 가져가면 안 된다. 의심해야 속이려는 자들의 허점이 드러날 것이고, 정당하게 받아야 할 사람들에게 지급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제 철저하게 의심하기로 했다.



한 통의 전화가 왔다.

"제가 예전에 한부모 특례 받았던 지급 내역을 정확하게 확인하고 싶어요."

한 건, 한 건 정확한 계산 방식과 십원 단위 액수까지 다 알려달라고 하셔서 성실하게 답을 해드리고 있었다.

그분이 이어서 또

"제가 만약에 또 아이를 낳아서 한부모가 된다면, 22년 정책이 달라지는 게 있다는 데 다 설명해주세요"

이건 좀 예시가 이상했다. 본인도 느꼈는지 어색해서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한 웃음소리가 감지됐다.


끊고 나서 옆 주무관님에게 말했다.

"주무관님, 의심스러운데요. 상당히 의심스러워요. 작년에 진짜 한부모였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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