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크대 작은 창문 위에 곱게 익어 금방이라도 터져버릴 것 같은 홍시가 줄지어 있다. 고운 주황빛이 가을의 푸른 하늘과 대비되어 선명하게 느껴진다. 찬 바람이 불어오는 계절이 오면 나뭇가지 무겁게 축 처진 홍시가 대롱대롱 이다.
홍시를 보면 우리 엄마가 떠오른다. 어릴 적 외할아버지 댁은 작은 감나무밭을 하셨다. 감나무 아래를 뒤뚱뒤뚱 걸어 다니는 오리 가족과 작은 개울에 사는 거머리도 있었다. 가을이 오면 농장에 가서 감 수확을 도와드렸다. 수확한 감들을 선별기에 넣으면 무게별로 작은 감부터 큰 감까지 나뉘었다. 그 모습이 재밌어 한참을 데구루루 굴러가는 감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외할머니께서 이리와 이것 좀 맛보라며 부르셨다. 그때 먹었던 달콤한 단감과 홍시는 지금까지도 내가 가을을 기다리는 이유 중 하나가 되었다. 외할아버지가 감 농장을 했던 영향인지 엄마는 홍시를 좋아하신다. 내가 성인이 되기 전에 외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감 농장은 없어졌지만, 지금 살고 계신 부모님 댁 옆집는 감나무밭이 있다. 그래서 요즘은 마당으로 넘어온 가지에 달린 홍시를 서리해 드신다. 우리는 홍시를 사서 먹을 필요가 없다고 말하며 웃는 엄마의 얼굴이 떠오른다.
홍시를 먹으려면 양손에 다 묻혀가며 껍질과 과육을 분리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따라온다. 달콤한 홍시 맛을 본 손녀딸들이 득달같이 입을 벌려대며 달려든다. 한 숟갈 한 숟갈 정성스레 떠먹여 주는 엄마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본다. 얼마 전 친구에게서 들었던 말이 생각난다. ‘야, 엄마의 걱정은 임종이 다 돼서야 끝이 난다더라.’ 부정할 수 없는 말이다. 예전에는 아이가 성인이 되어 결혼하고 집을 떠나면 부모의 역할이 어느 정도 끝이 났었다. 하지만 요즘에는 이야기가 다르다. 실컷 시집, 장가까지 보냈더니 이제는 손주까지 봐달라고 한다. 그래서 새롭게 생겨난 단어도 있다. 바로 ‘황혼 육아’이다. 엄마의 역할은 아이가 성인이 되어 결혼하고 부모가 되어서도 여전히 끝나지 않는다. 이제는 엄마의 역할뿐만 아니라 육아하는 할머니의 역할까지 모두 해내야 한다.
어릴 적 내가 기억하는 엄마의 모습은 항상 바쁘시고 웃음이 별로 없으셨다. 내가 초등학교 시절부터 성인이 돼서도 일을 계속해오신 엄마는 항상 일 때문에 힘들어하셨다. 초등학교 시절 친구가 엄마와 단둘이 데이트했다는 말을 듣고 너무 부러웠다. 그래서 엄마랑 데이트하는 것이 소원이라고 말했더니 엄마는 “그런 게 무슨 소원이야?” 하며 바로 나를 데리고 시내로 나가셨다. 정확히 무엇을 했는지 기억이 나질 않지만 분명 즐거웠다. 그날 찍은 ‘우리 둘만 있는 스티커 사진’이 내 책상 서랍에 고이 자리하고 있다. 나는 그렇게 손쉽게(?) 엄마와의 데이트 소원을 이뤘다. 한 번은 그런 적도 있었다. 매일 아침 등교하는 나보다 일찍 나서는 엄마에게 시를 써서 보여줬다. 대충 내용은 이러했다.
…
내가 밥을 먹는 이유는 아침에 잠깐이라도 엄마의 얼굴을 보고 싶어서이다.
내가 엄마가 회사에 있는데 전화하는 이유는 엄마의 목소리가 그리워서이다.
학교에 다녀와 나를 반기는 것은 냉장고가 돌아가는 소리뿐이다.
엄마가 더 바빠진다니, 내 인생은 행복 끝 불행 시작이다.
...
그 밖에도 친구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교환일기도 시도했었다. 엄마의 답장은 고작 세 편의 일기로 끝났지만 말이다. 다양한 방법으로 엄마와 소통하고 싶었다. 엄마의 관심과 사랑은 받아도 받아도 모자라게 느껴졌었다. 항상 서운한 마음이 자리했었다.
친정에서 돌아오는 길이면 풍성해진 마음만큼 양손에는 먹을거리로 가득하다. 저녁 밥을 먹은 아이들이 홍시 냄새를 언제 맡았는지 먹고 싶다 조른다. 설거지와 정리까지 모두 끝낸 부엌이지만 다시 한쪽 불을 켠다. 잘 익은 홍시의 꼭지를 따고 엄지손가락을 안쪽으로 넣어 반으로 쪼갠다. 반절은 손바닥 위에 반절은 그릇 위에 올린다. 손바닥에 올려놓은 반쪽 홍시를 아이 등 긁어주듯이 숟가락으로 살살 긁는다. 달콤한 냄새를 풍기는 과육을 그릇에 담아낸다. 순간 우리 엄마의 모습과 내가 그대로 겹친다.
아이를 낳고 나니, 엄마가 되어보니 엄마의 모습이 이해된다. 왜 그렇게 나를 대했는지 항상 따뜻한 모습으로 웃어줄 수는 없었던 이유를. 아빠를 참 많이 닮았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의 나는 엄마와 아주 닮아있다. 어릴 적 할머니 댁에 가는 길에 엄마는 차 안에서 노래를 듣는 것을 힘들어하셨다. 한참 노래를 듣다가 끄고는 “어휴 이제야 좀 살 것 같네.” 말씀하셨다. 이어폰을 귀에서 빼는 순간이 없을 정도로 항상 노래를 듣던 나였다. 차 안에서 노래를 끄는 사람은 이제 내가 돼버렸다.
닮고 싶지 않았던 엄마의 모습도, 닮고 싶었던 엄마의 모습도 나에게 있다. 엄마는 끊임없이 배우고 도전하는 사람이다. 한 번은 꽃차 만들기 수업을 듣고서는 거기에 푹 빠져 열심히 꽃차를 만드셨다. 완성된 꽃차를 선물하고도 넘쳐 집에다 장을 새로 짜서 벽 한 면을 가득 채워 놓기도 하셨다. 자수를 배우실 때는 놀러 온 손녀의 바지에 무당벌레를 수놓아 주셨고 자수 손수건을 몇 장이나 주셨다. 도자기를 배우실 때는 집에 컵과 그릇들이 넘쳐났다. 그 밖에 천에 그림 그리기, 손바늘질, 캘리그라피, 도장 만들기 그리고 바리스타 자격증까지! 가장 최근에는 천연 염색에 푹 빠지셔서 덕분에 올해 여름은 아기똥풀로 염색한 인견 이불을 시원하게 덮고 잘 수 있었다. 우리 집 잠옷이 죄다 천연 염색한 옷으로 바뀌었고 염색한 손수건과 스카프도 한가득하다. 이제는 편하게 쉬어도 될 것 같은 나이라고 생각했지만, 엄마는 쉬지 않으셨다. 꾸준하게 일기와 글을 쓰는 나의 습관도 엄마에게 물려받은 것이다. 이제는 블로그에 차곡차곡 글을 올리신다. 아빠와 함께했던 여행기, 도보 행군 일지도 빼놓지 않으신다. 앞서 말한 배운 것들의 과정도 폴더별로 기록되어있다. 계속해서 새로운 일을 찾는다는 것은 에너지가 꽤 들기에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우리 엄마를 존경한다. 한 사람으로서, 여자로서 응원한다. 엄마를 사랑한다.
첫째를 낳고 난 후 엄마의 무릎에 안겨 울었던 적이 있다. 엄마는 나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엄마보다 더 좋은 엄마가 될 거야.”
‘우리 아이들은 나를 어떤 엄마로 기억하게 될까.’ 문득 궁금해지는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