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보 미안해… 촬영 일정이 날씨 때문에 바뀌었어. 어쩌지 시간이 안 맞겠는데?”
“… 어쩔 수 없지 뭐. 괜찮아 다음에 다시 날 잡아서 다녀오면 되지~”
친정에 너무 가고 싶었다. 육체적으로는 어느 정도 적응이 되어 괜찮았지만, 정신적으로 지쳐버렸다. 그러나 지방 촬영을 하러 간 남편이 나와 아이들을 기차역까지 태워줄 수 없었고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기차역에 갈 수 없었다. 물론 큰 짐을 들고 두 아이와 두 번의 환승을 하며 버스와 지하철을 타고 한 시간 반이 걸려 기차역으로 갈 수도 있었다. 아니면 거금의 택시비를 들여갈 수도 있었지만 매번 그럴 수는 없었다. 그래서 결심했다, 직접 운전해서 가보자! 그러나 네 시간은 절대 만만하지 않았다. 3살, 6살 둘을 데리고 혼자서 고속도로를 달릴 수 있을까 심히 걱정됐다. ‘둘째가 떼를 쓰거나 둘이 싸우면 어쩌지?’ 내일 출발할 수 있을지 생각하니 숨이 제대로 안 쉬어지고 가슴이 쿵쾅거렸다. 고민하면서 이미 내 손은 캐리어에 짐을 챙기고 있었다. 차에서 마실 물과 넉넉한 간식도 빠짐없이 챙겼고 아침에 챙겨야 할 목록을 적어 냉장고 문에 붙여 놓았다. 혼자서 해내고 싶었다. 언젠가는 아이들이 커서 혼자 친정으로 운전해서 갈 수 있겠다고 생각했던 것을 실행으로 옮겼다. 최근 차를 타고 다닐 때를 떠올려보니 가능하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고 굳은 결심과 함께 잠자리에 들었다. 스스로 ‘그래 까짓것 그냥 가보면 되지! 뭐 어려운 일이라고.’ 주문을 걸었다.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눈이 번쩍 뜨였다. 일어난 아이들에게 최대한 간절한 목소리로 엄마를 도와줘야 한다고 단단히 일러두었다.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둘째가 과자를 바닥에 떨어뜨리며 떼를 쓰기 시작했다. 그때 든든한 첫째 딸이 야무지게도 둘째를 살뜰하게 챙겼고 그 뒤로도 몇 번의 작은 고비를 첫째 덕분에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 낮잠을 두 시간 정도 재울 계획이었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주유소 아저씨의 에어컨 필터 점검으로 잠든 아이들을 깨워버리기도 했었다. 모든 것이 계획대로 되지는 않았지만, 휴게소까지 알차게 들려 총 4시간 만에 무사히 친정집에 도착했다. 창밖에서 들려오는 손녀딸의 목소리에 부리나케 뛰어나온 엄마의 얼굴을 보니 ‘드디어 해냈다!’ 하는 안도감과 반가움이 함께 했다. 비로소 나는 두려움을 깨고 누군가의 도움 없이 ‘어디든’ 갈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남편은 이 소식을 듣고 이제 쓸모없는 남편이 되는 거 아니냐며 진심 섞인 농담도 했지만!
바람은 시원하고 햇볕이 따뜻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계절, 가을이 왔다. 이맘때 친정에 오면 하는 일이 있는데 바로 ‘봉숭아 꽃물 들이기’이다. 여름이 벌써 지났지만, 아직 봉숭아꽃이 나를 기다려주고 있었다. 마당의 한 편에 자리 잡은 거대한 봉숭아 꽃밭이 있다. “아빠! 오늘 봉숭아 꽃물 들이자.” 신나게 외쳤다. 그러면 귀엽다는 듯 웃으시며 “그래~” 하셨다. 창고에 쌓인 각양각색 바구니 중에 빨갛고 납작한 것을 꺼내 들고 마당으로 나간다. 봉숭아 꽃물을 들이기 위해서는 꽃뿐만 아니라 반드시 이파리도 필요하다.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고 빛깔 좋고 깨끗한 것으로 골라본다. 한참을 이리저리 꽃밭을 뒤져가며 찾는다. 아이들도 궁금한지 옆에 앉아 함께한다. 바구니 가득 담아 집으로 들어온다. 작은 벌레들이 있기에 물로 한 번 헹궈준다. 절구에 이파리와 꽃을 넣고 콩콩 찧다 명반 한 꼬집을 추가한다. 초록빛의 즙으로 가득한 봉숭아 꽃물덩이가 손톱에 올라갈 준비를 모두 마쳤다. 비닐장갑의 손가락 부분을 가위로 잘라 놓고 일회용 반창고도 함께 준비한다.
물들이기 좋은 시간은 바로 잠자리 직전이다. 샤워와 양치까지 모두 마치고 더 이상 손에 물을 묻히지 않아도 될 만큼의 준비가 필요하다. 가능하면 화장실도 다녀와 완벽한 준비를 끝낸다. 엄마는 찧어둔 봉숭아 꽃물을 핀셋으로 적당히 집어 내 손톱에 올려주신다. 마무리 작업은 손이 야무진 아빠의 몫이다. 잘라 놓은 비닐장갑을 손가락에 넣어 딱 맞게 감싸준다. 반창고로 쓱 붙여주면 끝. 열 손가락에 모두 물을 들였어도 아쉬운 마음에 양쪽 엄지발가락까지 하고 나면 비로소 기분이 좋아진다. 기나긴 밤을 지나 눈을 뜨면 쪼글쪼글해지다 못해 아리게 아픈, 붉게 물든 열 손가락이 나를 맞이하고 있을 것이다. 지금은 반창고로 편리하게 마무리하지만 어릴 적엔 비닐봉지를 작은 네모로 잘라 하얀 실로 하나하나 묶어 주셨다. 너무 세게 묶어버린 손가락은 밤새 저릿하기도 했지만. 딸과 손녀딸 둘, 총 서른 개의 손가락과 여섯 개의 발가락에 봉숭아 꽃물을 모두 올린 엄마와 아빠는 옛 추억과 뿌듯함에 맥주 한 캔 들이키신다.
문방구에 봉숭아 꽃가루를 판다. 가루는 번거로움과 인내심이 필요 없다. 십 분이면 간편하게 붉은 손톱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봉숭아 꽃물을 들여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가루로 물들인 것과 생잎을 따다 물들인 것은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흉내는 낼 수 있어도 원조의 따듯함과 색감을 따라가지 못한다. 편리하다는 장점이 있긴 하다. 하지만 공장에서 만든 봉숭아 꽃가루에는 정이 가지 않는다. 원조 ‘봉숭아 꽃물 들이기’가 좋다. 꽃잎, 이파리를 고르는 고민과 찧어 놓은 봉숭아를 작은 손톱에 올려주는 정성 그리고 비닐로 덮어 꽁꽁 묶는 단단함이 들어있다. 빨리 할 수 있는 것이 아닌 밤새도록 손톱이 물들기를 기다리는 그 시간이 아름답다. 무엇이든지 빠르게 하는 세상 속에서 ‘봉숭아 꽃물 들이기’만큼은 천천히 하고 싶다.
천천히 행해야 아름다운 것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다. 결과가 전부가 아니라 과정 또한 아주 중요하다는 것. 인내심을 가지고 정성을 쏟는 가치를 아는 어른이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