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 앞에서는 단단하게, 약자에게는 따뜻하게
엊그제의 일이다. 하루와 산책을 하고 있었다. 그날은 비가 와서 우비를 챙겨 입고나왔다. 우리 하루 우비도 찾아봤지만 어디에 두었는지 쉽사리 찾아지지 않았다. 그래서 하루 우비는 포기하고 그냥 나왔다. 어차피 하루는 우비 입으면 더워서 싫어하고, 우비 없이도 비 맞으며 즐겁게 잘 뛰어노는 녀석이니까.
"하루야, 비가 와도 걸어야 하지? 산책이 보약이다 그렇지?"
하고 하루를 향해 웃었다. 하루도 신이 나서 웃는다. 말을 알아들은 건 아니겠지만^^
맞은 편에서 까만 스탠더드 푸들이 걸어오고 있었다. 그 아이도 산책을 나온 모양이었다. 덩치는 컸지만 사뿐사뿐한 걸음걸이에서 순한 성격이 느껴졌다. 그 스탠더드 푸들의 견주분도 우리 하루를 보았는지 조심하려는 기색을 보였다. 그 스탠더드 푸들의 견주분이 스탠더드 푸들의 줄을 당겨 길 한쪽 편으로 비켜서게 했다. 나도 나름의 준비를 하고 하루와 지나갔다. 하루의 시야에서 스탠더드 푸들이 내 몸으로 가려지도록, 내가 길 안쪽으로 하루를 길 바깥쪽으로 걷게 했다.
"왈! 왈! 왈왈!!"
소용없었다. 하루가 벌써 냄새를 맡았는지, 그 대형견을 향해 달려들며 짖어댔다. 상대편 견주분이 스탠더드 푸들을 앉혔다.
"아유, 하루야, 무서워서 그래? 괜찮아~ 친구가 길도 비켜주고 기다려주고 있네~."
하면서 달래 보았지만 소용없었다. 할 수없이 하루 줄을 잡고 후다닥 뛰어서 그 자리를 벗어났다.
아주 드물게 대형견과 만나도 자신감 있게 다가가 인사를 하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지난번 함덕해수욕장에서 만난 하얀 사모예드처럼. 함덕해수욕장의 초록빛 잔디를 걷다 구름처럼 폭실하게 생긴 하얀 사모예드와 만난 적이 있다. 당연히 하루가 무서워할 거라고 생각하고 하루의 시야를 가려주려고 하는데, 갑자기 하루가 사모예드에게 가더니 두 개가 서로 코를 맞대고 킁킁거렸다.
"하루야, 네가 왠일이야? 안 무서워? "라고 물으니 상대편 견주분이
"얼떨결에 인사했지?" 하며 하루를 향해 웃었다.
하지만 이런 경우는 드물고 대부분의 경우 하루는 저돌적으로 대형견에게 달려들며 엄청난 기세로 짖는다. 제주로 오기 전, 우리 집 근처에서 산책할 때, 헤벌쭉하고 웃는 얼굴로 살랑살랑 꼬리를 흔들며 맞은편에서 걸어오던 골든리트리버를 만났을 때도 그랬다.
"왈! 왈!! 으르르왈왈왈!!!-"
어찌나 엄청난 기세로 짖던지 그 소리에 길가 식당 주인아저씨가 나와서
"야 이놈아, 네가 더 무섭다."라고 했다.
반면, 하루보다 작은 아이들을 만났을 때는 양상이 아주 다르다. 7kg의 하루는 소형견 중에는 큰 편이고, 중형견에 중에선 가장 작은 편에 속한다. 그래서인지, 몸집이 하루와 비슷한 비숑, 말티푸, 푸들 등을 제외한 모든 소형견들이 하루를 향해 거의 죽을 듯 짖는다.
그때 하루의 반응이 신기하다. 자기보다 엄청나게 큰 대형견들한테는 그렇게 짖어댔어도, 이 아이들 앞에서는 순한 양처럼 행동한다. 상대가 자기를 향해 달려들며 짖어도, 절대 맞대응하지 않고 온화한 표정으로 느긋하게 앞으로 걸어간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사례는 제주 오기 전 집 근처 산에서 아기 강아지를 만났을 때였다. 하루가 한 살이나 두 살쯤 되었을 때였다. 여름이어서 아스팔트 길은 덥고, 그렇다고 산책을 건너 뛸 수는 없어서 집 근처 산에서 산책 중이었다. 숲이 주는 시원한 그늘과 청량함에 기분이 좋아 천천히 걷고 있는데, 하루가 갑자기 칭얼거렸다.
"끙끙끙끙"
"하루야, 왜 그래?"
알고 보니 맞은편에서 한 여성분이 귀여운 아기 강아지를 안고 우리 쪽으로 오고 있었다. 까만 털과 하얀 털이 섞인 정말 조그마한 새끼였다. 하루는 대형견을 제외한 다른 개를 발견하면 저렇게 끙끙 거리는 소리를 낸다. 그 개와 인사를 하고 싶어서다. 상대편 견주분이
"인사하고 싶어서 그러는구나." 하고 웃으면서 강아지를 땅에 내려주었다. 그런데 3개월쯤 되어 보이는 아기 강아지는 하루를 무서워했다. 몸집은 하루의 반 정도 되었을까, 아니 그보다 더 작았을까? 그러자 하루는 예상치 못한 행동을 했다. 발라당 뒤집어 배를 보여준 것이다. 그러자 아기 강아지도 하루를 덜 무서워했다.
강자 앞에서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고, 약자 앞에서는 배려와 따뜻함으로 몸을 낮추는 하루. 아마도 대형견 앞에서의 맹렬함은 두려움에 대응하는 하루만의 방식일 것이다.
두려움에 빠져 함몰되는 대신, 자신만의 방법으로 단단하게 삶을 살아가는 것, 그리고 한없이 약한 존재 앞에서는 그 입장이 되어 이해하고 먼저 배를 보여주어 위협을 가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하루의 배려는 약한 모습이 아니라, 진정 강한 자만이 할 수 있는 행동일 것이다.
나도 하루처럼 두려움 앞에서는 나를 지키고, 약한 존재에게는 먼저 배려하는, 단단하고 따뜻한 사람이 되길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