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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홉 Nov 28. 2019

01. 자취방에서

단편소설 <수림: 愁 霖>



   내 생의 가장 찬란한 순간은 아직 오지 않았음을 나는 알고 있다. 과거의 기억은 땅으로 흩어져 사라진 지 오래고 미래의 행복한 순간은 아직 보지 못했다. 그러나 나는 현재에 살고 있다. 앞으로도 평생을 현재에 허덕일 것이고 그다음에 올 최고의 순간을 그리워하며 한탄할 것이다. 과거는 늘 잊혀가고 내 몸과 영혼의 은신은 앞으로도 여기 머물 텐데 말이야. 이렇게 한가한 생각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닌데.


하는 생각에 눈을 떴다. 퀴퀴한 곰팡내가 코를 찌른다. 음 역시 내방이야. 어젯밤 나를 위한 선물이라며 대령한 배달 음식의 향연들과 밤새 돌아간, 가열된 노트북의 온기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널브러진 연녹색의 재킷을 주워 입고 밖으로 나간다. 평소와 똑같은 하루가 시작되는구나.


오늘은 학교에 유명한 강사가 강연하러 오는 날이다. 그래서인지 오늘따라 학과 사람들이 북적거린다. 자줏빛 천으로 감싸진 의자에 앉아 남들 SNS 좀 뒤적거리다 보니 강연이 시작되었다.


“여러분 사람이 죽을 때 가장 많이 하는 후회가 뭔지 아세요?”


강연자의 말에 소란스럽던 강의실이 침묵과 함께 내려앉는다. 가장 많이 하는 후회.. 못다 한 꿈 아니면 가보지 못한 곳이겠지. 뻔하다.


“바로 자신이 하고 싶었던 일을 못 한 것이라고 합니다. 특히 남들 따라 인생을 산 사람들이 그런 후회를 많이 하죠.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인생의 주인공은 남이 아닌 나라는 것입니다”


그걸 누가 모르나? 괜한 심술을 부린다. 강연자까지 마음에 안 든다. 책이든 방송이든 어디서 본 것 같은 이야기를 그럴싸하게 말하고 있는 거 아닌가. 나도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왔다고 생각한다. 뭐 그런 과정에 남들 하나쯤 겪은 어려운 시기도 있었고, 그것도 잘 극복했다고 생각하다가도 문득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삶을 반복하고 있다는 착각이 든다. 착각인지 진짜인지. 강연자가 말하는 ‘진짜 나의 삶’이 무엇인지 강연을 들었는데도 잘 모르겠다. 그저 의자에 앉아 심드렁한 표정으로 강연을 듣고 있는 내가 알 수 있는 건 아닐 거다.


“여러분 자신의 삶을 사세요. 여러분이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이상 김윤석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그의 말이 끝나자 객석에서 뜨거운 박수가 밀려왔다. 반복적인 손놀림에 담긴 감동과 환호의 물결들. 그 물결이 일렁이다 내 발밑에서 멈춘다. 나는 진심으로 박수를 보낼 수 없었다. 사람들 사이에서 또 한 번의 외로움을 느낀다. 이대로 괜찮은 걸까. 의문과 함께 자신을 위로하던 사이에 이야기는 막을 내렸고 썰물처럼 사람들은 빠져나갔다.


“여보세요? 지윤아 지금 강연 끝났지? 점심 먹자”


“너 어딘데? 그럼 지금 후문으로 갈게”


학과 친구이자 대학 생활을 즐겁게 만들어 준 친한 친구 서현의 전화이다. 서현이는 신입생 때부터 지금까지 쭉 친하게 지내는 동기이다. 외향적이면서 자기 할 일을 똑 부러지게 하는 성격이라 늘 닮고 싶은 사람 중 한 명이다.


서현의 전화를 끊고 서둘러 학교 후문으로 내려갔다.


“지윤아 강연 재밌었어? 난 오늘 동아리라 못 갔잖아.”


“강연? 뭐 철학적이고 뻔하지만 맞는 말씀 하시더라”


“그래? 그래도 강연은 그 사람의 가치관과 생각이니깐 무조건 정답은 아니야.”


공식에 맞춰 풀다 보면 정답이 나오는 수학 문제처럼, 인생의 자잘한 고민 따위에도 방향과 답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과정은 그리 순탄하진 않지만 어쨌든 그 끝에는 내가 원하는 값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랬다면 방황하지 않고 목표지점을 향해 쭉 나아갈 텐데.


내 인생은 초등학교 6학년짜리가 수능 시험문제를 풀려고 애쓰는 느낌이다. 중학생도, 고등학생도 아닌 터무니없는 나이에 말이다. 풀리지도 않거니와 풀어도 정작 의미가 없는 어려운 공부. 나는 왜 이걸 하고 있을까.


“그래 서현아, 시시한 이야기는 그만하고 밥이나 먹자”


죽음과 인생에 관한 사담은 늘 종결을 맺지 못하고 허공으로 떠돈다. 열불을 토해내며 각자의 말을 하다가도 끝나지 않는 토론에 지쳐 열기는 빠르게 식어간다.


면발에 섞인 질퍽한 토마토소스가 버무려진 스파게티를 포크로 휙-휙 저으며 입 한가득 밀어 넣었다.

 제법 익살스러운 표정이 지어진다.

꼬여 있는 면발이 일렬로 입속으로 사라질 때쯤 묘한 공허함과 허무를 느낀다.


“여기 스파게티 별로다. 지윤아 그렇지?”


서현이는 크림 스파게티를 후딱 해치우고 작게 속닥거렸다. 그의 말에 동의한 듯이 오른손을 쭉 펴서 입을 가려 ‘맞아’ 하고 맞장구를 쳤다.


“너 이제 뭐 해?”


식사를 마치고 헤어짐을 예상한 나는 서현에게 할 일을 물었다. 서현이가 오늘 정말 뭘 할지 궁금해서인지, 아니면 혼자 있기 싫어서 인지는 잘 모르겠다.


“나? 이제 카페 알바 가야지. 가기 싫다”


“바쁘네. 아쉽다”


서현이는 학교에서 버스를 타고 30 정도 떨어진 카페에서 3년째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카페 일이 적성에 맞는 다나 뭐라나. 암튼  재밌게 하는  같다.  크게 공감이  가지만 어쨌든.

그렇게 아쉽게 헤어지고 나는 다시 혼자가 되었다. 방에 가기 아쉬운 마음에 이곳저곳 돌아다녀 볼까 생각했지만, 갑자기 피곤해져서 이내 방으로 들어왔다.


오랫동안 가열되어 열이 오른 노트북은 이상한 기계음을 내며 윙윙거린다.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따가운 소음이 귀에 박혀 불안함을 내뿜고 있다. 황급히 노트북의 전원을 끄고 차가운 물 한 잔을 마셨다.

지금 당장은 노트북도 못 하고, 밥도 먹었고, 뭐할지 고민만 하다 침대에 누워 핸드폰을 만졌다.

페이스북에 새 글이 더는 올라오지 않을 때까지 SNS를 하다 보니 어느새 시계는 6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저녁 식사 고민으로 냉장고를 열었다 닫았다. 주말에 피곤하다는 핑계로 장을 보지 않아 찬거리가 딱히 없었다. 인터넷으로 시킨 500미리 페트병 물 몇 개, 햇반 4개와 고추장 조금뿐이었다. 짧은 한숨을 내뱉고 냉장고에 덕지덕지 붙은 형형색색의 전단지를 하나 가져왔다. 오늘은 치킨과 함께 영화 한 편을 볼 것이다. 이게 내 유일한 안식이자 취미 생활이다.


“배달 왔습니다!”


배달원의 반가운 소리에 맞춰 맥주를 꺼내고, 치킨 박스를 열었다. 내가 좋아하는 닭다리부터 먹을까, 퍽퍽 살부터 먹을까 고민하다 결국 제일 꺼리는 부위부터 천천히 먹기 시작한다. 그건 비로소 남은 행복의 순간을 마지막으로 미루기 위해서이다. 오른손은 치킨을 먹고 왼손으로는 영화를 찾았다.


오늘의 영화는 ‘당신이 잠든 사이에!’ 95년에 개봉한 사랑 영화이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로맨스 영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현실에서는 그런 비현실적인 사랑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었기 때문에 시간 낭비라고 생각했다. 차라리 허구를 믿는다면 SF나 좀비 영화가 더 재밌고, 실감 나니깐 말이다.


그러나 때로는 현실이라고 믿고 싶은 사랑 이야기가 듣고 싶을 때도 있다. 바로 오늘이 그런 밤이다.

영화 속에 나오는 여주인공은 평범한 기차 티켓 판매원이고 손님으로 온 멋진 코트를 입은 남자 주인공을 짝사랑한다. 그러다 우연히 철도에 떨어져 기절한 남자를 구해주고 가족들에게 약혼녀 행세를 하며 병원을 들락거린다. 그러나 결말은 남자의 동생과 사랑에 빠지게 되는 스토리다.


인생은 내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 것처럼 꼬이고 꼬여 결국 나도 모르는 장소에 도착하게 된다.

영화의 막이 끝났을 땐 모든 것이 텅 비어 있었다. 치킨도 내 공간도, 나도. 침대에 누워 하루의 끝의 허무함을 느낀다. 몇 시간의 시간이 덧없이 느껴졌다. 마치 이 공간의 주인이 내가 아니라는 듯이, 누런 벽지들이 몸부림쳤다. 이방인일 뿐인 나를 차가운 새벽으로 내쫓을 것만 같았다.


난 오늘 죽기로 했다. 오늘 들은 강연이 나한테만 그저 그랬고, 오랜만에 먹은 토마토 스파게티는 맛이 없었고, 오늘 본 로맨스 영화는 기대에 못 미칠 만큼 지루했으니깐.


 사람들은 각자 원하는 인생을 위해 노력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그 끝은 누구도 알 수 없다. 알지도 못하는 종착지로 향하면서 겪게 되는 어떤 고난과 역경도 싫고, 그걸 이겨내려고 노력하는 것도 싫다. 다독이며 스스로를 돌아보고, 삶을 개척해가라는 메시지도 이젠 더 이상 달갑지 않다. 삶은 지독한 슬픔과 영원하지 않은 행복의 반복이다. 부모의 선택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태어난 ‘축복받은 갓난아기’는 그 시점부터 죽어간다. 인생은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기다리는 것인데, 사람들은 이런 사실이 너무 두려워 잊어버리고 사는 것은 아닐까.


찰리 채플린의 <모던 타임스> 영화에 나오는 공장 기계처럼 삶은 여러 개의 부속품이 맞물려 돌아가고 돌아간다. 그리고 전원장치를 끄는 순간 모든 기계들이 멈출 것이다. 오르막과 내리막의 반복을 이미 아는데, 삶을 이미 아는데, 더 이상 궁금한 게 없는데 어떤 의문을 품으며 살아가야 할까. 이 어둠을 틈타 도주할 수 있다면. 그런데 어디로 도망쳐야 하는지 모르겠다.


결국 인생이란 반복적으로 찾아오는 고통과 짧은 희열을 매번 느끼는 것일 뿐이다. 이게 어떤 의미가 있는 건지 모르겠다. 이런 의문을 답해줄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래 그것 때문에 나는 더는 살고 싶지 않다. 지독한 고난도, 절절한 사랑 때문도 아닌 그저 일상의 지루함과 이따금 찾아오는 고통 때문이다. 단지 그것뿐이다.


벼랑 끝에 있는 우리를 위해







단편소설 <수림: 愁 霖>  

00. 에필로그 

02. 동네 카페 

03. 두려운 밤

04. 마지막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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