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년, 열두달 흔들리는 꽃: 2월 Essay

2월 Essay_결국 시작과 끝의 페이지는 내가 넘기는 것

by 문혜정 maya

브런치에 연재된 플라워 에세이 '일 년, 열두 달 흔들리는 꽃'이 2021년 4월 말, '꽃이 필요한 모든 순간'이라는 제목으로 정식 출판/발간됩니다.


이제 서점에서 만나요!





'일년, 열두달 흔들리는 꽃'은 매월,

하나의 에세이와 그 달에 어울리는 꽃과 사진을 정리한 이야기, 총 2개의 글을 발행합니다.








2월_February Essay

결국 시작과 끝의 페이지는 내가 넘기는 것: 오락가락 하는 내 마음에 지칠 때













그간 나는 조금 지쳤었다.

지겹디 지겨운 지난 한해가 얼른 끝나길 바라는 한편, 새롭게 시작되는 한 해는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세워놓은 계획은 풍성한데 그걸 실행하는 나라는 인간은 그걸 수행할만한 그릇이 되긴 하는가에 대한 회의감, 그리고 금방 다시 찾아온 두번째 리셋의 기회(설날)까지.


반성과 후회->새로운 다짐->새로운 계획->약간의 실행과 좌절->반성과 후회->설날맞이 새로운 다짐.....X2


올해가 시작된지 얼마되지 않았는데 마치 죽자마자 인생2회차를 시작한 사람처럼 쉴새없이 달려온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지친 기분과는 다르게, 돌아보면 남아 있는 흔적이 거의 없다. 나는 그저 머리속으로만 가열찬 인생을 살았을 뿐.

그 괴리가 현타로 가다오고, 그리고 나면 연초부터 슬럼프에 빠지는 건 시간문제다.

나님은 작년과 똑같이 올해도 똑같이 게으르고 부정적이며 결국 벗어나고 싶었던 내 모습으로 돌아가고야 마는 그런 사람이었구나.....를 깨닫게 되면 이제 겨우 2월인데 마음은 11월 중순을 넘긴 사람처럼 지쳐서 헐떡이게 되는 것이다.



@mayaflor




무언가 잘 풀리지 않는 내게, 사람들은 너무 쉽게

'이런 걸 해보면 어때?'

'저런 건 아직 안해봤지?'

'이런 것들이 요즘 트렌드라던데.'라며 한마디를 보탠다.

아니, 당신이 알지 못할 뿐 나는 그것을 해 보았고, 저런것도 이미 시도해 보았으며, 그 트렌드라는 건 이미 몇년전부터 알고 있었어.

아무렇지않게 웃으며 넘기지만 어쩐지 어색하게 표정관리가 되지 않는 내 안에서는 신경질적인 마음의 소리가 끄응,하는 한숨과 함께 훅 올라왔다가 사그라든다. 당신이 알고 있는 것을 내가 모르리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기분이 상한다.

하지만 어쩔 수 없지. 나는 성공하지 못했고, 나에게 조언을 건내는 수많은 그들은 이미 성공했는 걸.



쭈구리가 되어 뜨끈하고 어두운 이불속으로 기어들어가 넷플릭스 영화 목록이나 훑어보며 시간을 죽이고 싶은 유혹과 싸우며 내가 떠올리는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장은 내가 넘겨야 한다는 사실이다.

어쩌면, 나에겐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이불 안의 평온한 시간이 필요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정말 내가 그걸 원하는 걸까?

진짜야?

나는 지금 읽히지 않는 책의 한 귀절에 붙잡혀 그 부분만을 되감기하듯 반복해서 읽고 있는 지도 모른다. 이 책은 너무 어렵지만, 대체로 대부분의 구절은 재미도 없지만, 정해진 시간 안에 반드시 읽어야만 하는 것이라서 집어던지지도 못한채 붙잡혀 있는 것일 수도.



그래서 나는 그냥 넘기기로 했다. 그건 포기일 수도 있고 체념일 수도 있지만 내가 선택한 것은 '그냥 다시 시작'이었다. 완벽히 첫 페이지로 돌아가는 시작이 아니라 대충 뭉개고 다음 페이지로 넘기는 그런 시작. 그런다고 해서 내가 이 책을 읽지 않은 건 아닐테니 말이다. 나는 이 책의 모든 부분을 세세히 하나하나 다 이해하는 건 아닐 수도 있지만 대략적으로, 대충, 흐름정도는 알 수 있을 것이다. 누군가와 이 책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엔 그 부분은 모르는척 슬쩍 넘겨버리고 내가 잘 아는 부분이 나왔을 때만 잘난 척 떠들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보통 자주 그렇게 하는 것처럼 말이다.



@mayaflor




나는 습자지처럼 얇은 꽃잎이 셀 수 없이 겹겹이 쌓인 라넌큘러스를 좋아한다. 아주 오랫동안 내가 사랑하는 꽃 No.1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꽃이다. 땡땡한 공처럼 작은 봉오리의 라넌큘러스는 시간이 지나면 얇은 꽃잎을 하나하나 펼치며 우아하게 얼굴을 드러낸다. 이렇게 많은 꽃잎이 이 작은 봉오리 안에 들어 있었나싶게 놀랍다. 그리고 대체로 봉오리의 상태로 사도 잘 피는 꽃 중 하나다. 플로리스트의 입장에서 보자면 아주 기특한 녀석이라고 할 수 있다.



아직 다 피어나지 않는 나는 마치 얇디 얇은 문고판책처럼 보잘 것 없어 보일수 있다. 아무도 모를 때, 누구도 나에게 주목할지 않을 때 나는 나를 붙잡고 있는 이 페이지를 넘겨버려야겠다. 나에게 얼마나 풍성한 내용이 숨어 있는지, 이제부터 나올 내용이 지금까지의 것들보다 더 유용할 것이라고 스스로 믿으면서.



사람들은 그냥 포기하는 사람에겐 관대하지않다. 포기하기 까지의 과정을 속속들이 잘 알지도 못하면서 날이 선 비난과 모욕적인 비판을 서슴지 않는다. 선을 넘은 오지랖도 쉽게 부린다. 하지만 다행이도 실패에서 벗어나고자 새로운 시작을 꿈꾸는 사람에게는 관대한 편이다. 그러니 내 스스로 이 페이지만 넘기면, 그 다음은 조금 더 수월해질 것이다.



속을 감춘 땡땅하고 작은 봉오리, 한장 한장은 보잘 것 없는 얇은 꽃잎이다. 나는.

하지만 천천히 시간을 들여 모두 펼치고 나면 그땐 알 수 없었던, 나를 멈추게 했던 어려운 그 부분이 나의 전부가 아니라 이 모든 과정의 한 부분이었음을 알 수 있겠지.




@mayaflor










매월 첫번째 월요일에는 그 달의 에세이를 써서 발행합니다.

그리고 매월 마지막 금요일에는 그 달에 어울리는 꽃, 직접 만든 꽃, 찍어 놓은 사진을 정리하여 발행합니다.

저의 글과 꽃과 사진이 선물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지난글]

Prologue_꽃도 흔들리는데

12월_Essay: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12월_Flowers: 삼나무/비단향/더글라스/크리스마스부쉬 &Flowers

1월_Essay: 내 속도와 방향이 당신 눈엔 불완전해 보이겠지만

1월_Flowers: 헬레보러스/미모사/산수유/왕버들 &Flow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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