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쾌한 City Life : 男2 女2 시트콤
사소한 킬러 20화
오피스텔
3일 만에 캘러한은 집이나 다름없는 오피스텔로 돌아왔습니다.
'지금쯤이면 동치과 화도 풀렸을 테고' (풀렸겠니?)
번호키 앞에 서서, 안 맞는 줄 알면서도 예전 번호키를 계속 누릅니다. 일종의 고집이죠.
‘100번 누르면 되지 않을까?’
절대 안 됩니다. 기계는 그런 거 없어요. 그런데 거짓말처럼 문이 열렸어요.
‘오! 역시, 신은 나를 버리지 않았어!’
아닙니다. 신은 캘러한을 진작에 버렸어요. 적어도 신이 있다면 말이죠.
더구나 문을 열어준 건 신이 아니라 김동훈 씨였습니다.
안에서 삐빅거리는 번호키 누르는 소리를 듣다 듣다 짜증 나서 ‘열림' 버튼을 눌러 준 것이죠.
“있었어?”
김동훈 씨는 캘러한을 보지도 않고 휙 들어가 버렸습니다. 누가 봐도 삐친 거죠.
나 화났으니 알아서 잘해라, 이런 뜻이었는데 캘러한은 ‘잘하는' 스타일이 전혀 아닙니다.
캘러한은 속없이 좋아라 하고 냉큼 거실을 가로질러 자기 방으로 쑤욱 들어갔습니다. 한 마디 사과도 없이.
“역시 집이 좋아!”
그러나 방문이 벌컥, 연속동작으로 김동훈 씨가 소리 지릅니다.
“뭐 해? 짐 안 싸? 짐 싸서 나가라고 열어준 거니까 빨리 싸서 나가!”
“싫은데?”
캘러한은 침대에 드러누워 뺀질뺀질. 뻔뻔.
“그래? 알았어.”
김동훈 씨는 지체없이 경찰서에 전화를 걸었습니다.
“거기 ✦✦경찰서죠?”
캘러한이 빨딱 일어나 휴대폰을 뺐었습니다. 김동훈 씨는 뺏긴 휴대폰을 향해 큰소리로 말했어요.
“여기 휴지 도둑놈 있으니까 어서 와서 잡아가요!”
캘러한이 서둘러 통화종료 버튼을 눌렀습니다. 그래도 김동훈 씨는 계속해서 소리 질렀어요.
“내 말 들려요? 여기 휴지 도둑놈이…”
“치과! 진정해. 우리 말로 하자. 동업자끼리.”
“동업자? 동업자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이 악질, 최고로 나쁜, 인간 개XX야!”
김동훈 씨는 방언 터지듯 생애 처음으로 10음절 이상의 욕을 했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한 욕에 놀라 말을 멈췄어요.
캘러한도 놀랐습니다. 얼마나 놀랐는지, 그만 실수로 사과하고 말았죠.
“미안!”
“뭐?”
“미안하다고!”
김동훈 씨는 캘러한의 사과에 눈이 똥그래졌습니다. 그토록 바랬던 사과를 받았지만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는 건 왜일까요?
그래서 물었죠?
“도무지 이유가 뭐야?”
“미안하니까 미안하다고 한 건데, 이유가 어딨어?”
“그것 말고, 왜 도망쳤어? 치사하게 나만 남겨두고.”
김동훈 씨의 목소리가 떨렸습니다. 자칫 울 것 같습니다. 또 서러움이 몰려드는 것이었죠.
캘러한이 선하지도 않고, 치사하기가 이를 데 없는 인간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자신을 버릴 것까지는 생각 안 했던 거죠.
그런 거 있지 않습니까? 진짜 나쁜 인간이라도 넘지 않는 선이 있다는. 캘러한이 아무리 비겁해도 친구를 버리지는 않는다. 그런데 친구였나요?
“그게 말이지. 내가 경찰서에 가면 안 되는 사정이 있어서.”
“왜? 지명수배 중이야?”
“그건 아니지만. 그런 게 있어.”
그 답지 않은 변명을 하면서 캘러한은 생각했습니다. 내가 왜 변명을 하고 있지? 무시하면 되는데.
“박서우 씨하고 사귄다며? 박서우 씨는 경찰 아니야?”
“그건 다르지. 그 여자는 날 잡아갈 생각이 전혀 없잖아.”
“솔직히 말해! 무슨 죄를 저질렀어?”
김동훈 씨가 또렷하게 쳐다봅니다. 이번에야 말로 캘러한의 비밀을 알아내겠다는 각오가 담겨있었어요.
캘러한은 망설이더니.
“살인? 그게 죄라면 살인죄가 되겠네. 난 킬러니까.”
김동훈 씨는 할 말을 잃었습니다. 살인은 당연히 죄인데, 캘러한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일까요?
하긴, 캘러한은 처음부터 솔직하게 말했습니다. 자신이 킬러라고.
김동훈 씨는 그걸 알면서 룸메로 받아들인 것이고요. 다만 캘러한이 헛소리한다고 생각했던 것이죠.
이제 인정할 때가 됐습니다. 캘러한은 킬러가 맞다. 그러면,
“나도 죽일 거야?”
“내가 치과를? 왜?”
“혹시 모르잖아. 누가 의뢰할 수도 있고.”
캘러한이 고민합니다.
“흐음. 보통은 액수만 맞으면 누구든 죽여주긴 하는데, 이 일도 예외라는 게 있으니까. 무엇보다 치과는 동업자잖아! 그러니까 대답은 ‘노'.”
안심입니다. 그리고 한심합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일로 안심하는 김동훈 씨 자신이 너무 한심했던 거죠.
“좋아. 이번 한 번만 봐준다. 대신 조건이 있어.”
“??”
“첫째, 방세는 제 때 꼭 낼 것. 둘째, 당신이 하는 어떤 불법행위에도 날 끌어들이지 말 것. 셋째, 이게 제일 중요해. 다시는 날 버리고 혼자 도망치지 말 것.”
“오케이. 그 정도야 기본이지!”
하지만 캘러한은 첫째와 둘째 약속은 지키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셋째는 몰라도요.
“마지막으로 하나 더. 유나 씨에게 고맙다는 말을 해.”
“유나? 전유나? 네 여친? 왜?”
“유나 씨가 당신 한 번만 봐주라고 부탁했어.”
웬만하면 궁금하지 않은 캘러한이 이번에는 궁금합니다.
“이유는?”
“말할 수 없어!”
김동훈 씨의 얼굴이 빨개집니다. 뻔뻔해도 눈치하나는 귀신 뺨치는 캘러한이 대번에 속사정을 꿰뚫었습니다.
“치과. 너 전유나하고 잤구나! 그래, 경찰서에서 나오고 외박했다지? 여인의 동정심을 이용해서 바로 침대로 쑥.”
“그게 아니라…!”
캘러한은 격렬히 부정하는 김동훈 씨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습니다.
“부끄러워할 것 없어. 잘했어. 아주 잘했어. 그러니까 내가 뭐랄까? 너네 둘 사랑의 큐피드 같은 것인가? 그러고 보니 둘이 만난 것도 나 때문이고, 뜨거운 밤을 보낸 것도 나 때문이니.. 역시 전유나 그 여자는 좀 된 거 같아. 내가 고맙다고 할 건 없는 것 같고, 유나 씨에게 대신 전해줘. 너무 고마워할 것 없다고. 그래도 고마우면 밥이나 한번 사라고. 푸하하.”
캘러한은 인간 자체가 헷갈립니다.
눈치가 없는 것 같으면 눈치가 있고, 치밀한 것 같다가도 허술하기 짝이 없습니다.
반면, 조안나는 원투투 피트니스클럽의 회원들과 끈끈한 관계를 유지하며 온 동네 정보를 다 취합하고 있었죠.
그런 조안나의 안테나에 캘러한이 섹시한 여자를 만나고 다닌다는 첩보가 입수됐습니다.
물론 그 여자가 박서우는 아니었죠.
캘러한, 이 못된 인간이 바람까지 피우고 다닌다고 생각하니...
박서우의 이번 생 유일한 친구로서 조안나는 눈에 불꽃이 튀었습니다. (왜 니가?)
“내가 이런 말까지는 안 하려고 했는데, 그 인간이 꼴에 바람피우고 다닌다네. 넌 모르지?”
“캘러한이? 사람 자체를 안 좋아하는데 그럴 리가.. 무슨 소문 들었는데?”
“소문이 아니고 확실한 정보야. 캘러한이 요 앞에 빵집에서 어떤 섹시한 여자와 데이트하고 있는 것을 목격한 사람이 있어.”
“거기라면 나도 같이 간 적 있는데. 나 보고 그러는 거 아니야?”
박서우의 때아닌 남자 친구 변호(?)에 조안나는 비웃으며 손가락을 흔들었습니다.
“절대 아니지. 미모의 섹시한 여성이라고 그랬다고. 니 몸 어느 구석에 '섹시(sexy)'가 있니? 잘 봐줘야 '귀욤'이지!”
“죽을래?”
“죽여줘.”
“이리 와.”
“니가 와.”
라임이 척척 맞습니다. 박서우가 피식 웃으니 조안나도 웃습니다.
“그런데 궁금하긴 하네. 섹시한 여자가 누구인지.”
“찾아줘?”
“응.”
“찾으면?”
“죽여야지.”
“아주 캘러한하고 붙어 다니더니 쌍으로 잘 논다. 툭하면 죽이네 뭐네. 뭐, 의뢰비만 주면 간단히 찾아줄게. 그 뒤로 죽이든 찜 쪄 먹든 알아서 하시고.”
“의뢰비를 달라고? “
“당연하지. 친구 사이라도 의뢰는 의뢰니까.”
역시 조안나도 프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