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민하지만 자극은 필요하니까, 달리기

너그러움의 범주 안에서 지각을 용서받을 수 있는 필살기

by 김바리

오래전에 포기했던 일을 다시 시작해 오히려 전보다 더 좋아하게 된 적이 있나요?


저에게는 달리기가 그런 존재입니다.


중학교 2학년까지 배드민턴 운동선수로 활동했습니다. 체력을 기르기 위한 훈련의 시작은 항상 단체 러닝이었지요. 이 러닝은 종종 개인전으로 변형되어 결승점에 나중에 들어온 순으로 벌의 크기가 커지는 이벤트가 많았답니다. 결코 즐겁지 않은 이벤트죠.


그래서인지 오랫동안 저에게 '달리기'란 '벌(罰)'의 다른 말 같았습니다. 운동을 그만두고 오랜 시간이 지났고 필라테스, 요가, 수영 등 다양한 운동을 해왔지만 달리기 만큼은 제 체력을 기르기 위한 운동 후보로 가장 후순위에 있었던 셈이지요.




미라클 저널이 오늘로 488일 차가 되었습니다. 노트에 '달리기'라는 키워드가 등장하기 시작한 건 올해 3월 4일 무렵이네요. '달리기 3km'라고만 적혀 있을 뿐 왜 달리기를 시작하려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앞뒤 페이지 몇 장을 들춰봐도 적혀있지를 않습니다. 다만 3월 4일에 적은 넋두리에서 '출처 없는 우울함'을 고민하는 내용의 글이 적혀있습니다만, 추측건대 신체 활동을 통해 당시 우울한 상황을 조금 개선해보고자 했던 게 아닐까 싶습니다.


당시 코로나로 인해 직장을 그만두고 아르바이트 개념으로 작은 회사 일을 돕고 있었고, 본격적인 이직을 위해 이것저것 준비하면서 계획했던 일정보다 점점 더 늦춰지는 이직에 불안해하던 때였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엉뚱하게 3월 4일 자 내용에서는 '이 우울함이 연애를 하지 않아서인가?'라고 운을 떼고 있습니다 (이렇게 적고 얼마 안 있다가 문제의 '틴더'를 시작하였고요).


감히 비교할 수는 없지만 영화 <아워 바디>의 타이틀 카피처럼 저에게 3월은 '멈추고 싶은 순간'이었고, 그 순간을 견디게 해 준 것이 '달리기'였습니다. 행정고시 8년 차 고시생 자영의 삶의 무게에 비하면 지극히 가벼운 수준의 것이었을 수도 있습니다만, 고통의 감정이란 언제나 상대적이기 마련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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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아워 바디>




일주일 전, 10킬로 달리기 완주를 끝으로 2021년 달리기 목표를 달성했습니다. 이 또한 계획했던 것보다는 한 달 늦어진 것입니다만, 너무 춥지 않은 봄에서 가을까지 무리하지 않고 해당 월에 해당하는 키로수만큼 달리자는 것이 3월 즈음에 정한 목표였기에, 11월 21일, 무려 20일 정도 늦은 목표 달성이지만 스스로에게 어깨를 토닥여 주고 싶은 아주 뜻깊은 경험이었습니다.


집 앞에서부터 살살 조깅으로 시작해 중간중간 숨이 차오를 때는 걷기도 하였지만, 홍체천을 따라 망원 한강 공원을 지나 합정역 절두산이 있는 성당까지 다다르니 정확히 10킬로를 채울 수 있었습니다. 나름 달리기를 시작하며 기대했던 엔딩은 10킬로 인증숏을 찍은 후 한강 공원 편의점에서 산 캔맥주를 들고 배가 정박하는 비탈길에 털썩 앉아 캔맥주를 따 마시며 한강을 조망하는 것이었는데요. 이 날 미세먼지가 정말 최근 들어 역대급이었던 탓에 어쩔 수 없이 뜻을 접고 터덜 터덜 합정역으로 향했습니다.


그래도 무언가 스스로에게 한시라도 빨리 보상을 해주고픈 마음에 합정역 지하철 역사에 들어가기 전 알라딘에 들러 괜히 하루키 책을 두 권 구매하였습니다. 물론 에세이로요.


달리기에는 여러 가지 효능이 있지만, 이미 알려진 것 이외에 제가 개인적으로 느끼는 장점에는 이런 것들이 있습니다. 첫째로, 아침에 달리는 나는 제법 멋져 보입니다. 제가 달리는 시간의 공원은 주로 통근을 위해 바삐 지나치는 어른들과 강아지와 산책 나온 어르신들이 대부분입니다. 이러한 인파 속을 헤쳐 평일 여덟 시 무렵 홀로 공원을 달리고 있는 나의 모습은 그렇게 흔한 광경은 아닙니다. 그렇기에 누리는 약간의 특권의식이랄까요 (누구도 인정하지 않은 특권인 것 같지만요).


둘째로, 하루 일과 중 자기 효능감 50%를 먹고 들어갈 수 있는 활동이라는 점입니다. 이 판단 또한 지극히 주관적인 것입니다만, 아침 일찍 달리기를 하고 출근하는 저를 저 스스로는 굉장히 뿌듯해하는 편입니다. 왜냐하면 아침에 반드시 달려야 하는 이유가 없음에도 무거운 몸을 이끌고 일어나 달리고 온 나란 사람이 꽤 멋져 보이기 때문입니다 (첫째도 둘째도 허세가 심하네요).


하루키는 그의 달리기 에세이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에서 계속 달려야 하는 이유는 아주 조금밖에 없지만 달리는 것을 그만둘 이유라면 대형 트럭 가득히 있다며, 우리에게 가능한 것은 그 '아주 적은 이유'를 하나하나 소중하게 단련하는 일뿐이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에세이 내용 중에서 이 부분을 특히나 좋아합니다. 아침 일찍 달리고 들어온 날에는 마치 제가 하루키와 조금 더 흡사한 가치관을 갖게 된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기 때문이죠.


이 외에도 개인적으로 달리기의 장점을 이야기하자면 네댓 개가 더 있지만, 최근에 겪은 일을 하나 이야기하자면 바로 평소의 달리기 연습이 '프로지각러의 삶'에 꽤 도움을 준다는 것입니다.


이 또한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저는 '프로지각러'입니다. 대신에 이 지각의 개념에 조금 변명을 드리자면, 어떤 모임이든 항상 딱 10분 정도만 늦는 편인데요. 이게 굉장히 심리적인 이유인 것 같긴 한데, 면접 자리이거나 영화 상영이 정시에 이루어져서 출입이 금지되는 그런 엄격한 경우가 아닌 경우에는 이상하게 꼭 10분 정도는 느긋한 마음으로 그 '대화의 장'에 입장하고 싶은 기분이 듭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 나 오늘 10분 지각해야지.' 라며 문을 나서는 것은 아닙니다만, 네이버 길 찾기로 소요 시간을 계산하고 문을 나서면 꼭 10분씩 늦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10분 더 일찍 나올 생각을 왜 하지 않느냐 라고 묻는다면 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만).


아무튼 이런 '프로지각러'에게 10분의 지각이 눈앞에 보일 무렵, 대개 지하철 역사를 나와 모임 장소까지 5~10분 정도 도보로 걸어야 하는 거리일 무렵 제 달리기 습관이 조명을 받는 순간이 도래하는 것이지요. 평소라면 분명 10분 늦었을 모임이지만, 도보로 걸을 거리를 쉬지 않고 적당한 빠르기로 달리면 한 자릿수 숫자로 지각을 하게 되는 거죠. 말인즉슨 너그러움의 범주 안에서 제 지각이 용인되는 것입니다 (유레카).


매번 지각하는 사람의 변명이 이렇게 구차할 줄이야. 제 지각을 관용으로 이해해주신 여러분들에게 이 자리를 빌려 심심한 사과를 드립니다.


규칙적으로 달리기 시작한 이후로 습관적인 우울에서도 많이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한창 일이 힘든 시기에는 수면 습관도 무너진 데다가 달리기 조차도 게을리했었는데요. 그 당시에는 우울감이 더 심하게 느껴졌던 것 같습니다.


요즘은 감사하게도 격일에 한 번은 달릴 수 있는 환경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조금 피곤하더라도 하다 못해 삼일에 한 번은 달리려고 하고 있고요. 이제 날이 많이 추워졌고, 올해 목표로 한 키로수는 달성을 해서 조금 나태해지긴 했습니다.




본격적으로 겨울이 찾아오면 실외 달리기 대신 어떤 운동을 해야 할지 아직 고민입니다. 달리기만큼 제 삶에서 큰 의미를 준 운동을 또 만날 수 있을까요? 하루키처럼 풀 마라토너는 아니더라도 단거리, 10km 마라톤을 꾸준히 달리는 러너가 되고 싶습니다. 달리기를 하는 동안 최소한 이 말은 제 마음속의 신념으로 자리 잡아 있을 것이에요.


올 2월 1일에 미라클 저널에 적었던 글을 다시 꺼내 보며 이 글을 마무리합니다.



자기만의 영역에서 입지를 다진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차이는 달리기를 매일 연습한 마라톤 선수와 그렇지 않은 아마추어 러너와의 차이 같다. 감히 마라톤 풀코스를 뛸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하지만, 일단 그는 뛰지 않는다. 매일 뛰며, 자신의 지금의 위치를 알고, 도전해야 할 과제를 피하거나 실패를 단정 짓지 않고 수행하는 것. 결국 차이는 '했냐, 안했냐.'이다. 나는 결국 '한' 사람이 되고 싶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 사이에 둘러싸이고 싶다. 하다마는 게 아닌, 하다 못해 1000일 정도는 해보고 그제야 '아, 나는 이 부분에선 부족하구나!'라고 포기하게 되더라도 일단은 도전해보는 , 그런 사람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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