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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꾸는 곰돌이 Mar 02. 2024

자기파멸적 유서, 《살아남은 자의 슬픔》

독일의 천재적 문인 브레히트는 여성 관계에서 자유분방한 면모를 보였다. 《아침저녁으로 읽기 위하여》의 주인공 베르나우, 가장 오랜 기간 동안 공동 작업을 했던 하우프트만 및 전 아내들 등 다양한 연인과 사랑을 나눴고, 시간을 보냈다. 그중 한명은 슈테핀이다. 사실 보수적 윤리관에 기초하면 부도덕하기 짝이 없는 불륜 관계-양다리도 아닌 삼다리 관계라, 브레히트가 얼마나 그녀를 사랑했는지 모른다. 그래서 진실로 그녀를 사랑했을지는 모른다. 그러니 롤랑 바르트의 '저자의 죽음'을 고려한 후, 이 시를 낭만화시켜보면 세상에서 가장 비극적인 시가 된다.

 

"죽을 만큼 사랑해"라는 말을 하고는 한다. 짝사랑, 인생에 한 번 뿐인 치명적인 사랑을 하면, 행복하기보다 우울해지는 경험, 베르테르적 욕망을 경험한다. 진실된 깊은 사랑을 하게 되면, "사랑하는 것은 천국을 살짝 엿보는 것이다"는 카렌 선드의 명언을 떠올리게끔 한다. 중요한 것은 천국에 도달했다는 것이 아니라, 천국을 살짝 엿보는 것이라는 점으로, 천국을 알면서도 천국에 도달하지 못한다면, 현실은 연옥조차 아닌 지옥이다. 프로이트적으로 말하자면, 아주 깊은 치명적 사랑, 성적 본능인 에로스는 죽음의 본능인 타나토스와 같다는 것이다. 즉, 너무나 사랑하면 죽고 싶다는 것이다.


시 <살아남은 자의 슬픔>은 연인관계였던 슈테핀이 나치 독일 시절 망명을 하다 병으로 죽은 그녀를 드고 쓴 시이다. 브레히트에게 에로스의 달콤함이 느껴진 시로 <아침저녁으로 읽기 위하여>가 있다면, 에로스이 죽음이 느꺼진 시로는 이 시를 들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진실로 사랑하는 사람이 죽는다면, 사랑하는 사랑을 위해 죽지 못한 '살아남은 자'의 고통은 상징계의 언어로 표현될 수 없는 상상계의 붕괴로 다가올 것이다. 브레히트는 지극히 일상적인 언어로, 가장 비극적인 슬픔을 말한다. <아침저녁으로 읽기 위하여>에서 고백을 했다면, 이 시에서는 자신을 붕괴시킨다. 그래서  <살아남은 자의 슬픔>진실로 사랑한 연인을 잃은 사람에게 레퀴엠보다 자기 파멸적 유서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그래서 문학은 위대하다.

사랑하는 그대가 없는 세상, 루카치식으로 선험적 고향상실을 가능하게 하니까. 세상에서 가장 큰 슬픔을 언어로 배우게 되며, 다른 차원의 자기 혐오도 느끼게 해준다. 그러니 문학은 위대한 수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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