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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비 Jun 04. 2024

가라앉기

여섯 번째 엽서. 쓸모없음에 대하여

여름 반팔을 찾겠다고

작은방 서랍을 뒤지다가

언제 넣어두었는지 모를

파지 한 무더기를 찾았다.


돌아와 책상을 보니

난 여전히 쓰지도 않을 파지만

또 한 무더기 쌓아두었다.


가만보면 나는 오래전부터 이렇게

어떤 의미있는 글줄을 만들지도 못하고

어떤 길을 찾아냈다는 지도도 그리지 못하고

무의미하고 쓸모없는

파지만 일관되게 생산하고 있는 셈인데

이는 참 지구에게 미안한 짓이다.


생각해보면

내 책상 위에 있는 것 중

가장 쓸만한 것은 역시

내 손을 가장 덜 탄 것이다.


아직 넘겨지지 않은 공책의 부분

아직 쓰여지지 않고 남아있는

펜의 잉크

아직 마셔지지 않고 남아있는

페트병 속의 물.


나는 유용한 무언가를

무용한 것으로 바꾸어가는데

골몰하지 않았음에도

이 일만큼은 마치 로봇청소기처럼

알아서 때때로 매끈하게 이루어져있다.


이런 생각을

이런 글로 바꾸어놓을 때마다

꼴깍꼴깍 차오르는

생의 어두움.


아무리 생각해도 내 생은

이래도 내일이 있고

이래도 더 가라앉을 수 있고

이래도 더 어두워질 수 있고

이래도 때때로 웃기도 한다는 게

유일한 의미인듯 한데.


아, 희망은

어쩌자고 이렇게 무턱대고 막막하게

넓고도 깊은 것인가.


2024. 06. 04.





며칠 전 읽은 책에서 너무 공감가는 대목이 있어서 옮겨보기로 한다.


작가들은 돈을 한 푼도 못 번다. 1달러나 벌까. 비참하다. 하지만 우리는 일도 안 한다. 우리는 정오까지 속옷 바람으로 빈둥거리다 아래층에 내려가 커피를 끓이고, 계란을 부치고, 신문을 보고, 책 좀 읽고, 책 냄새를 맡고, 도대체 책을 써야 하는 건지 고민하다 다시 책 냄새를 맡고, 딴 사람이 책을 썼다는 데 질투가 치밀어 책을 홱 내던지고, 하나님이 하늘에서 내 악한 질투나 그보다 더한 게으름을 보시지 않을까 은근히 두려워, 그 얼간이의 책을 집어던진 데 대한 심한 가책에 빠진다. 그러다 우리는 딴 사람의 시답잖은 말을 시기한 죄로 하나님이 내 말을 모두 말려 버릴까 은근히 두려워, 소파에 엎드려 그 분께 용서해 달라고 중얼거린다. 이렇게 한 대가로 우리는, 말했듯이 1달러를 번다. 그보다 훨씬 더 값나가는 우리가 말이다.

도널드 밀러 「재즈처럼 하나님은」 중에서


한참 웃다가, 기침을 하다가, 가슴을 긁으며 생각했다. 글을 써서 1달러라도 벌었으면 좋겠다고. 당신은 형편이 나보다는 나은 것이다. 어찌되었든 당신의 글은 집어던질 수 있도록 내 손에 도착하지 않았는가. 아, 벽을 향해 던지지도 못하고 침대 가운데로 푹 안착하게 던지는 이 생의 소심함이란. 언젠가 내 글이 누구에게 간다면 강속구가 될 수 있게 그립감 좋은 야구공 모양으로 책을 만들 수 있는지 문의 해야겠다. 누군가의 마음에 도움이 못 될 글줄이라면 어깨 근육을 단련하는데라도 도움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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