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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박가 May 01. 2024

내 작은 세상

  우리 집은 연년생인 언니가 엄마 배 속에 있을 때 새로 지었다고 한다. 기왕 짓는 거 조합장 아저씨네 집처럼 양옥으로 지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나는 내심 아쉬웠다. 빨간 벽돌을 쌓고 올라가다 윗부분은 시멘트로 반듯하게 발라 하얀 페인트를 칠한 그 집이 나는 참 멋스럽게 느껴졌다. 옥상으로 올라가는 일정한 간격의 계단도 신식으로 보여 부러웠다. 그 계단을 타고 올라가면 하늘의 구름이라도 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우리 집은 안방을 가운데 두고 왼쪽에는 사랑채, 오른쪽에는 헛간이 있는 n자 형태였다. 빨간 벽돌로 지은 집이 아니라는 아쉬운 점은 있었지만 우리 동네에서 다락이 있는 유일한 집이었다. 그것은 곧 나의 자랑이기도 했다. 다락은 부엌 바로 위에 있었는데 선선해서 어머니는 명절 때 전을 부치거나 떡을 해오면 다락에 올려두셨다. 우리는 어머니가 외출하신 틈에 도둑고양이처럼 몰래 올라가 전이나 떡을 야금야금 먹었다. 어떤 때는 2인조가 올라갔다가 먼저 온 다른 애를 만나기도 했다. 그럴 때면 공범들의 조용한 눈 마주침이 오고 갔다.


  겨울이 되면 다락은 냉장고가 되었다. 늦가을 끄트머리에 따둔 홍시를 다락의 창가에 두면 꽁꽁 얼었다. 숟가락으로 긁어내 먹으면 빙수처럼 아사삭 시원하면서 달콤했다. 기 십상인 식혜도 다락에 올려 두면 살얼음이 살살 얼어 입안이 얼얼하도록 맛있는 음료수가 되었다. 추워서 더 맛있었던 언 홍시와 식혜는 겨우내 우리의 훌륭한 간식이었다.


  다락 한쪽 귀퉁이에는 철 지난 옷더미가 쌓여있었다. 또 다른 귀퉁이엔 말린 고추 자루들이 주섬주섬 널려있기도 했다. 벽에는 소쿠리며 키 같은 것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다락은 이렇게 어머니의 식자재와 집안의 잡다한 물건을 보관하는 창고가 돼 주기도 했지만 우리에겐 훌륭한 놀이터가 돼 주었다.


  우리는 다락으로 오르는 계단에서 소꿉놀이를 자주 했다. 그 계단은 슈퍼가 되기도 하고 학교가 되기도 하고 어떤 때는 버스가 되기도 하였다. 때로는 숨바꼭질도 했다. 술래가 안방에서 열까지 세는 동안 다락의 온갖 짐 뒤에 숨었다. 빤히 어디 숨을지가 보여 때로는 위장술이 필요하기도 했다. 셋째 동생은 매번 용케도 끝까지 살아남아 우리를 놀라게 했다. 어느 날은 다락 위에서 합창을 했다. 울려 퍼지는 소리가 재미있어 목청이 떨리게 “아~”를 외치다가 누가 더 오래 소리를 낼 수 있는지 내기로 바꿔 놀기도 하였다.


  밤에는 무서워서 혼자 잘 올라가지 않았고, 동생들과 하나밖에 없었던 '후레쉬'를 들고 가서 놀았다. '후레쉬'를 켜면 천장에 동그란 무늬가 꿈틀거렸다. 껐다켰다하며 어둠과 빛에 적응하지 못한 눈이 갈피를 못 잡아도 재미있기만 했다. 다락을 수시로 오르락내리락해서 계단은 물론 문고리가 반질반질 윤이 났다.


  다락에는 마을 중심의 느티나무를 내려다볼 수 있는 작은 창이 하나 있었다. 불을 켜지 않고 올라가면 창 쪽으로만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혼자 다락으로 올라갈 때가 종종 있었다. 그곳에 누워 작은 창으로 보이는 마을 풍경은 늘 평화롭게 느껴졌다. 때로는 눈이 부셔 쉽게 뜨지 못하고 감고 있다가 잠이 들기도 하였다.


  나는 어둠이 주는 안락함을 다락에서 느꼈다. 혼자 있어도 밤이 아니면 다락이 무섭지 않았다. 작은 창 쪽으로 가 엎드려 책을 보기도 하고 그저 멍을 때리기도 하였다. 다락 아래 창밖으로 펼쳐지는 세상을 넋 놓고 바라보다가 대문으로 누군가 들어오는 게 보이면 벽 쪽으로 몸을 숨겨 오롯한 혼자만의 자유를 이어가고는 했다.


  둘째 아이를 어린이집에 처음으로 보내던 2013년 봄에 우리의 다락은 화재와 함께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나 나의 추억은 사라지지 않았다. 이제 다락이 있는 아파트에 살게 되면서  내가 누렸던 행복을 아이들과 공유할 수 있게 되었다. 그저 오르락내리락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던 그런 에서 다시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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