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명절 밥상
2012년 추석 명절에 시댁 식구들이 광주에 있는 둘째 시동생 집에서 모였다. 명절 음식을 함께 먹고, 재미있는 놀이도 하며 보내다가 며느리끼리만 해외여행을 다녀오자는 발칙한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추석 모임이 한창 무르익을 즈음, 아들은 명절 수송 버스를 타러 떠났다. 그게 건강했을 때 아들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의젓하며 늠름했던 아들은 그렇게 광주에서 포항으로 떠났다. 그러구러 한 달쯤 후에 아들은 캠퍼스 내에서 자전거 사고를 당하고 말았다. 지금까지 13년 동안, 아들은 의식이나 인지가 없는 최중증 장애 환자로 병상에 누워 있다.
그 이후, 우리에겐 명절이란 게 사라졌다. 명절에는 즐겁게 가족과 지내기보다는 오히려 간병 독박이었다. 아들을 돌보던 간병사나 활동지원사가 명절을 쉬러 떠난 자리를 우리 부부가 메꿔야 했기 때문이다.
스물네 번의 명절을 그렇게 보냈다.
그런데 이번에, 울산에 사는 셋째 시동생이 추석 연휴를 맞아 서울에 올라온다고 했다. 서울 은평구에 살고 있는 작은 시댁에 함께 가기로 했다. 그 작은 아버지는 우리 시아버지와는 배 다른 형제다. 그래도 작은어머니가 우리 형제들에게 늘 따뜻하게 대해주셨기에 감사한 마음이 가득하다.
아들을 돌보는 활동지원사들이 올해 추석 연휴에 자리를 비우지 않아서 우리도 작은 시댁에 갈 수 있었다. 룰룰랄라 하며 집을 나섰다. 마음이 설렜다. 여행 가는 기분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잃어버린 명절 추억을 소환하는 나들이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지만 아무런 문제가 아니었다.
이윽고 작은 시댁에 도착했다. 아, 그런데 입이 떡 벌어지고 말았다. 사촌 동서(작은댁 며느리)가 상다리가 휠 정도로 산해진미를 차려 놓았다. 얼마나 오랜만에 만나보는 명절 밥상이던가? 이럴 때 감개무량하다고 하는 거지.
그런데 30대인 젊은 동서가 그 많은 명절 음식을 준비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미루어 짐작컨대 며칠 전부터 음식 준비했을 것 같았다. 음식을 장만한 정성이 먹거리 속에 속속들이 배어 있었다. 명절 밥상이 격하게 우리를 환영하는 듯했다.
우리가 도착하니 작은어머니가 힘껏 안아주시며 말씀하셨다.
"그동안 고생 많았어.
걱정 내려놓고 천천히 맛있게 먹어.
오랜만에 명절을 쇠는 거지?"
내 남편은 작은어머니에게는 시댁 장조카다. 작은어머니는 시간을 내어 우리의 신접 살이 집을 얻어주셨다. 그해 김장 김치를 앙증맞은 장독에 담아서 가지고 오셨다. 그때는 그게 얼마나 소중한 사랑인지 제대로 모르고 지냈다. 나는 누군가에게 그런 사랑을 흉내도 낼 수조차 없어서 부끄러울 따름이다. (나의 브런치 글, 시월드 플렉스에서 발췌)
그동안 인생길 모롱이마다 작은 어머니가 계셨다. 작은 어머니댁 김장하는 날이었다.라는 글에도 작은 어머니의 사랑이 깃들어 있다. 이번에도 또 한 번 우리에게 멋진 사랑을 보여주셨다.
▲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도 실렸습니다.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317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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