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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으로 기약한 '다음'

버티고 버텨내서, 다시 너를 만나러 오겠다고 약속할게

by 는개

약 없는,

눈물 한 방울 없는



하루





너무 오랜만에 좋았어요.


나의 이 번뇌가 지나가면서 완전히 끝날 것이 언제가 될 진 모른대도, 그래도 지금 B와 함께 우리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이야기하는 이 시간만큼은 우울이나 잠시 제 곁을 비워 준 그런 느낌이었어요. 가장 좋아하는 친구랑 잠시라도 행복하라고 일부러.


친구 B가 집을 마련했다고 해서 놀러 갔어요.

본인의 힘으로 집을 마련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요.

친구가 대견하고 기뻐야 하는데 저는 그 애가 평생 살 집이라고 생각하니까 저와의 거리에 꽂혀서 손이 닿지 않은 너무 멀고 먼 곳인 것만 같아서 울음이 터졌어요.


기억나지 않는 어릴 때부터 친구였던 B와 나의 집의 거리는 항상 10분 내였어요.

그런데 이제는 운전을 해서도 1시간 10분이 넘게 걸리네요.


중간고사가 끝나면 함께 피자집에 몰려가 콜라를 먹고, 자정까지 독서실에서 공부하고 함께 집에 오고, 대학생 때는 한 두 달에 한 번 본가에 올 때마다 한 시간이라도 꼭 보기 위해 서로 갖은 노력을 했어요.


나의 내 인생의 절반 이상을 함께 했고

언제까지가 될지 모르지만 확실히 앞으로도 제겐 없을 사람이에요.


멀어진 게 처음도 아닌데

우리에게는 다음이 없는 게 아닌데.

집을 '샀다'라고 하니까

정착할 곳이라고 느껴져서 그런가 봐요.

거기에서 움직이지 않겠다는 말로 읽혔나 봐요.

기쁜데 너무 슬퍼요.


새벽 6시에 수영 수업을 다닐 정도로 규칙적인 아침형 인간인 B와

새벽 6시에 잠드는 것이 일상다반사인 불규칙적인 야행성 인간인 저.


하나부터 열까지 너무 다른데도

겨우 10분이라도 얼굴을 보고

자판기 커피라도 함께 마시겠다고

그리그리 노력했던.


그 노력이 눈부시게 눈물 나서

더더욱 너무너무 사랑하게 되었던.













함께 제가 마실 맥주를 사러 가면서 아파트 단지의 놀이터 정자에 앉아 치킨을 뜯어먹으며 맥주를 마시는 대학생들을 발견했어요. 그걸 보곤 똑같이 동네 놀이터 정자에서 맥주를 마셨던 과거를 동시에 떠올리곤 너, 나 할 것 없이 동시에 그때의 얘기를 꺼냈어요. 그 동시라는 타이밍에 깔깔대며 맥주를 사 와서 조용히 앉아 넓은 새 집의 구석구석을 보며 맥주를 마셨어요.


약 없이, 눈물 한 방울 없는 너무 오랜만의 행복이었어요.

집의 구석구석을 살펴보고 안방의 침대 위까지 누워 몇 번을 뒹굴고 붙박이장을 열고 깊이를 뼘어보며 방의 가로 세로로 양팔을 뻗어보며 닿지 않는다는데에 좋아했어요. 뭐가 그렇게 신기하냐며 헛웃음을 짓던 B가 현관벨소리에 나가더니 네가 좋아하는 거 시켜놨다며 배달음식을 식탁에 올려놓고 예쁜 그릇을 가져오더라고요.


이제는 천 원을 더 아끼려 뼈 있는 치킨을 주문하지도 않고,

더 많은 술을 위해 너무 많은 피쳐를 사지도 않아요.


그때와 똑같은 치킨과 맥주지만

그때와는 다른 치킨과 맥주예요.


저의 의견을 묻지도 않고 알아서 배달 주문한

제가 제일 가장 좋아하는 치킨과

가장 싼 생맥주나 피쳐가 아닌,

가격을 상관하지 않은 맥주.


기분이 좋지 않을수록 마시면 맛있는 흑맥주는 너무 썼어요. 그 쓴맛이 지금 내가 기분이 좋다는 증빙 같아서 기분이 좋아졌어요.


평소 먹던 흑맥주 말고 함께 먹던 라거맥주를 마시며 넓고 비어있는 거실을 뛰어다녔어요. 인테리어를 전부 새로 한, 방에 비해 거실이 넓은 구축 아파트의 거실을 어린이 마냥 방방 돌아다녔어요. 짐이 많지 않아서 더더욱 넓어 보인 그 집 여기저기를. 그런 저를 보며 B는 집을 산건 난데 왜 네가 더 그렇게 좋아하냐며 웃었어요.


나는 너무 좋았어요. 네가 바라던 일을 이뤄서요.

오랜만에 마음속에 예전의 감정이 피어났어요.

네가 하고 싶은 걸 했으면 좋겠다고.

화장품을 만들고 싶어 했던 B가 화학공학을 전공해 열심히 공부하던 그때, 네가 직접 만든 화장품을 사고 싶다고 생각하고, 얘기하고, 바랬던 그 마음이.

어디에 있었는지, 어디에 있었던지도 기억이 안나는 그 감정이 등나무처럼 마음을 뒤덮었습니다.


자신보다 기뻐하는 나를 보며 B는 복잡한 얼굴을 해 보였어요.

뭐가 복잡할까 생각했다가 그만뒀어요.

너무 오랜만에 느끼는, 우울이가 없는 내 마음이 오롯이 B의 행복에 반응했어요.

예전처럼.


하지만 어쨌든 저는 지금 너무 확실히 행복감을 느낀다고 느꼈어요.

평소 같았으면 폭풍전야가 아닐까 불안에 떨었을 텐데 그런 불안도 없었어요.

그저 웃는 B의 얼굴과

운동장처럼 넓은 거실,

드레스룸과 서재까지 있는

너의 집.






한참을 떠들고 노는데 B의 배우자가 퇴근하여 돌아왔어요.

그 손에 맥주가 들려있었어요. 더 필요할까 사 왔다고.

제 거였어요.


몇 개월, 아니 몇 년 만인지 모르겠어요

지금 살아있어서 이 감정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가,

하고 생각한 것이.




그리고 처음으로 말을 꺼냈어요.

나는 지금 우울증을 앓고 있고

병원에 다니기 시작한 지 몇 년이나 됐다고.

괜찮아져서 치료를 종료했었으나

재치료를 시작하게 됐고, 그 이후 1년이 넘었다고.


아무 말도 못 하는 B를 앞에 두고

저는 말했어요.


너와 나의 생일 사이, 보름정도의 날 중 하루를 잡아서

내가 좋아하는 치즈 케이크를 앞에 두고.

네가 좋아하는 말백을 마시자고.


대학생 때처럼, 사회 초년생 때처럼

저렴한 종류들 중에 그나마 사치 부릴 수 있었던 와인 말고, 너와 함께 먹어보고 싶었지만 너무 비싸서 언감생심 바라지도 못했던 그런 맛있는 와인을 마시자고.

치즈 함유량이 낮아 흉내내기에 지나지 않았던 그런 케이크 말고, 진하디 진해 취향이 아니면 먹지 못할 정도의 쿰쿰한 냄새를 풍기는, 그런 맛있는 치즈케이크를 먹자고.


손목이 너덜거리게 되더라도

어떻게든 버텨보겠다고.


나는 꼭 너와 와인을 마시겠다고.

나와 마시기 위한 풀 바디 와인잔과 디켄딩 도구를 사다 놓으라고.


어떤 대답도 못하고 한참을 아무 말이 없던 B는

헤어질 때 말했어요. 그 날 만나자고.


단 한마디뿐이었지만

돌아오는 길 내내 머릿속에 맴돌았어요.


그날 만나

.

. 그날 만나...

.

그날 만나...

.

.

그날 만나...





치료를 시작하고 몇 년 동안 스스로 기약이 있는 약속을 잡은 적이 없었어요.

몇 달 후를 생각하기에 당장 오늘을 살기도 힘들었고

죽고 싶다는 마음에게 끌려가지 않으려 노력했으니까요.

죽고 싶은데 왜 죽으면 안 되는지 알지 못한 채로

그저 말 잘 듣는 초등학생처럼

그냥.


선생님이 하라고 하니까 그렇게

그냥


그런데 처음이었어요.

다음에 만날 날을 기다리겠다는 마음이 든 것이.


다음에 만날 날까지는

어떻게든 살아야겠구나.


집에 잘 들어갔냐는 메시지에 답장을 했어요.

도착했다고.

언제 우울이가 돌아왔는지 슬퍼져 있었지만

한 마디를 더 붙여 보냈습니다

그 날 만나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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