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보다 더 나에게 너그러운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진료 중 선생님께서 제가 타인에게는 너그러우면서
자신에게는 너무 박한 것이 아니냐는 말씀을 하셨어요.
트러블 메이커네, 쟤만 있으면 별 일이 다 생긴다네 하면서
너무 자주 제멋대로에 분위기 파악 못한다는 얘기나 들어봤지,
희생적이라고 말한 사람도, 나 자신에게 박하다고 말한 사람도
없었어요.
너무 얼떨떨해서 며칠을 생각만 하고 있다가
이런 얘기를 들었다고 반려에게 얘기했어요.
그랬더니 또 생각지도 못한 의외의 말을 들었어요.
"난 자신에게도 엄격하고 타인에게도 박하지만, 너에게는 너그러워."
너에게는 너그러워, 라니.
너에게 너그러워
너에.. 너그러..
너그..
너그럽다니.
나에게는 너그럽다니.
모르는 단어가 아닌데
처음 듣는 외국어처럼 들렸어요.
처음 들었을 때는 어디서 발음은 들어본 적이 있는 것 같은 뜻을 모르는 외국어처럼 들렸는데 이제는 전 세계 어디서도 쓰지 않는 고대 수메르어나 히브리어처럼 들리더라고요
아니면 이미 멸종되어 버려 들을 수 없는 어느 아프리카 대륙의 원주민어 라던지....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것을 계획하고, 실행하며
무엇하나 빠뜨리는 것 없이 꼼꼼한 극강 잇티제인
반려의 엄격함은 알고 있어요.
매우 즉흥적이고 감정적인 극강 엔프피인 저는
범접할 수 없는 세상에 사는 사람이지요.
그 엄격함을 자기 자신에게는 칼같이 적응하면서,
내게는 너그럽다는 것이
솔직히 어느 정도 인지 딱히 어림짐작도 되지 않았어요.
나와는 기준이 다르니까요
어느 지난 날 봤던
그가 하루의 일정을 써 놓는 10분 단위의 플래너가 떠올랐습니다.
나는 절대 지키는 것이 불가능한 스케쥴러를.
어쨌든 아무 감정도 없이,
없이
없이
없이
두 사람의 말속에 잠식되어 몇 주를 흘려보냈습니다.
그저 글자만 떠올리면서.
한글을 그림처럼 보고 따라 쓰는,
글을 처음 배우는 유아가 된 것처럼.
그다음 진료에선 또 못 들은 얘기를 들었어요.
는개씨는 많은 걸 포용하려 하는군요.
앞이 새하얘졌습니다.
내가 그런 사람인지 모르겠다가도
내가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겠는 느낌이에요.
내가 어떤 사람인지
관찰하면 할수록
점점 더 미궁으로 빠지고 있어요.
뭐 그리 부족해서 과거에 갇혀 사는지
뭐 그리 불안해서 우울에 빠져 사는지
뭐 그리 무서워서 눈물이 그리 나는지
어쨌든 저는 요즘
누가 어디에서 언성을 높이면 공격당하는 것 같고 무섭습니다.
약으로 감정을 누르고 별 느낌 없이 사는데 조금은 익숙해졌는데도
왜 공포와 외로움은 가시질 않고 있는 걸까요.
하물며 우울이도 왔다 갔다, 잠시 자리를 비우기도 하는데.
늘 곁에 있었던 우울이의 역치가 너무 높아서
다른 감정들에 비해 우울이를 제가 편애하고 있는 걸까요.
그런 마음으로 나를 찾아 헤메입니다.
어떤 길도, 이정표조차도 없이.
내 마음이 먼저이게,
우선순위이게 두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여전히 모르겠어요
책에 쓰여있는 대로
내 마음을 다치면서까지 뭘 할 필요 있는지 판단해보려 하고
마음이 어떤 지 잣대를 드리워봐도 잘 안되네요.
내 마음이 먼저라고
틈만 나면 글자로 적고 보고 있습니다.
이해가 안 되면 외우기라도 해야지 싶어서요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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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나에게,
나 자신보다 더 나에게 너그러운 사람이 있다는 것으로
무서움이 조금은 가시는 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