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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량 May 01. 2024

8. 시골 아이들 2.

<소설> 나의 시인 할머니 금자 씨

"지아야, 진주야. 이따 6시에 여기서 만나는 거야. 알겠지?"

"네, 할머니."

"진주, 위험한 데 가지 말고. 지아는 아직 동네 잘 모르니까."

"아휴, 알겠어요. 걱정 마세요." 

"그래, 조심히 놀고 이따 보자."

"네~"

진주가 지아의 손을 잡고 모퉁이를 돌아 빠르게 사라졌다. 두 아이의 뒷모습이 사라진 후에도 금자 씨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놀 것도 없고, 볼 것도 없는 시골 마을에서 너무 심심해하는 지아에게 새로운 친구들이 생기는 것이 좋기도 했지만, 나쁜 무리와 어울릴까 걱정되기도 했다. 걱정하지 말라는 진주의 말을 믿었지만, 최근 들어 여러 나라에서 결혼이민을 오거나 취업비자로 들어온 사람들이 많아져서 염려가 되었다. 

"괜찮겠지...." 

금자 씨는 걱정스러운 마음을 애써 감추며 장바구니를 들고 재래시장으로 향했다. 



진주가 지아를 데려간 곳은 동전을 넣고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코인 노래방이었다. 지아는 가라오케가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동전으로 운영된다는 사실에 놀랐다. 이탈리아에 이런 게 생긴다면 아마 일주일이 채 안 되어 동전이 모두 털리고 말 것이다. 아니면 홈리스들의 본거지가 되어 얼마 못 가 폐업을 하게 될 게 뻔했다. 그에 비해 이곳의 코인 노래방은 매장 주인이 없어도 손님들이 알아서 출입하는 곳이었다. 동전이 필요하면 지폐를 넣어 동전을 바꿔주는 기계도 있었다. 좁은 룸에서 사람들이 소리 지르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지만, 아무도 서로 신경 쓰지 않았다. 지아는 신세계에 들어온 것 같았다.

진주는 매우 익숙하게 빈방을 골라 들어가서 미리 준비해 온 500원짜리 동전 4개를 넣었다. 그러곤 책자를 보지도 않고 리모컨으로 번호를 눌렀다. 곧 화면에는 유명한 걸그룹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빠른 템포의 노래를 부르며 진주는 손과 발을 흔들었다. 마치 화면 속 걸그룹이 된 것처럼 몸을 움직였다. 지아는 진주의 노래와 춤에 넋을 놓고 보고 있었다. 

"빰빠라밤~ 축하합니다. 98점입니다. 가수로 데뷔하셔야겠군요."

화면에서 폭죽이 터지며 박수가 흘러나왔다. 

“와, 진주 가수해도 되겠는데?”

"언니, 뭘 이 정도 가지고. 언닌 노래 골랐어?"

"어, 아니 아직. 너 노래 정말 잘한다. 춤도 잘 추고."

"언니도 빨리 불러봐.”

"난 아는 노래가 별로 없어서...." 

"그럼 나 하나 더 부를 테니까 천천히 골라. 이탈리아 노래가 있으려나? 아마 팝송은 있을걸?"

"그래?"

지아가 노래방 책자에 코를 박고 쳐다보고 있으니 진주가 웃으며 말했다.

"언니, 지금 공부해? 그냥 아무거나 해. 그냥 놀러 온 거잖아. 좀 못하면 어때?"

"응? 응... 내가 이런 데가 처음이라서...."

그사이에 진주는 노래 하나를 더 예약했다. 이번엔 느린 발라드곡이었다. 

"어둔 불빛 아래 촛불 하나~ 와인 잔에 담긴 약속 하나~ 항상 너의 곁에서 널 지켜줄 거야, 날 믿어준 너였잖아~~~~

후회하지 않아~ 오직 너를 위한 변하지 않는 사랑으로~ All I ever want is your love~" 

"와~ 노래 정말 좋다. 누구 노래야?"

"이거 옛날 노랜데, 우리 엄마가 좋아하는 드라마에 나와서 알게 된 노래야. 

"난 이거 불러볼게. 영화 맘마미아에 나온 노래인데.”

"아, 나 그거 알아. 근데 멜로디만 알아."

지아는 천천히 마이크를 입 가까이에 데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경쾌한 음악과 다르게 목소리는 떨리고 몸은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진주는 그런 지아를 향해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박수를 쳐주었다. 지아는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시도를 해보았다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찼다. 밀라노의 삶에 새로운 것은 거의 없었다. 이탈리아 나라 자체가 옛날의 방식을 고수하고, 옛 유산을 유지하는 것을 더욱 중요시했다. 그래서 학교 여름 방학이 너무 길어 힘드니 조정을 해야 한다는 의견에도 몇 년째 수정되지 않고 있었다. 그런 익숙한 일상이 평화로웠다. 하지만 큰 변화 없이 반복되는 삶이 지겹기도 했다. 

지아의 아빠는 성악을 전공했지만, 지아는 노래를 잘 부르지도 못했고 흥미도 없었다. 아빠를 따라 여러 극장을 다니며 오페라도 보고, 음악회도 봤지만, 감동을 크게 느끼지 못했다. 그렇다고 미적 감각이 있는 엄마를 닮은 것 같지도 않았다. 예술을 전공한 부모님에 비해 지아는 예술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엄마와 아빠는 그런 지아에게 서운해하지 않았다. 각자의 취향이 있을 뿐.  그건 강요해서 될 일이 아니라고 말했다. 

부모님 덕분에 어려서부터 여러 예술을 접할 수 있었지만 예술을 전문적으로 하고 싶진 않았다. 이탈리아엔 음악과 미술, 건축, 디자인 등 예술을 하는 사람들이 정말 많았고 그들 사이에서 동양인으로 살아남으려면 몇 배로 노력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지아는 자신이 뭘 좋아하고, 뭘 잘하는지 알지 못했다. 특별한 꿈이 없는 딸에게 엄마와 아빠는 뭐라고 하진 않았다. 때때로 지아 스스로 삶의 무기력을 느꼈을 뿐이었다.



"언니 영어 잘하나 보다."

"아니, 잘하진 못하고 그냥... 학교에서 배우니까 대화할 수 있는 정도야."

"언닌 좋겠다. 한국말도 잘하고, 이탈리아 말도 하고, 영어도 잘하고. 난 학교에서 배우는데도 영어를 못해. 근데 우리 엄마가 필리핀 사람이라고 하면 다들 내가 영어 잘할 거라고 생각한다니까. 나 사실은 가수가 되고 싶어. 걸그룹.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고.... 근데 여기가 너~~ 무 시골이잖아. 어디 배울 곳도 없어. 아 진짜 너무 답답하다니까. 그래서 맨날 여기 와서 노래 부르고 춤춰."

"와, 너 멋지다."

"흥, 멋지긴. 이런 시골에서 걸그룹이 되고 싶다는 게 좀 웃기지? 우리 오빠도 맨날 나한테 꿈 깨라고 그래. 근데 뭐 꿈은 자유니까."

"멋지고 부러워. 난 특별한 꿈이 없어서..."

"왜? 언니는 이탈리아 살잖아. 그것도 밀라노라며? 거기 살면 너무 좋을 것 같아. 이런 시골 아닐 거잖아. 얼마나 멋지겠어? 잘생긴 사람도 많을 것 같고 말이야. 이탈리아 남자들이 그렇게 젠틀하고 멋지다고 하던데."

"그런 사람도 있지만 아닌 사람도 많아."

"그래? 어 시간 얼마 안 남았다. 언니, 나 몇 개 더 부른다."

진주는 다시 리모컨으로 번호를 입력하고 마이크를 들었다. 

진주가 한참 춤을 추며 노래를 부르고 있을 때 누군가가 문을 열었다. 

"야! 흑진주. 너 또 여기서 노래 부르냐?”

지아와 진주는 갑자기 들어온 아이를 놀라서 쳐다보았다. 거기엔 머리를 노랗게 염색한 여자아이가 서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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