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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개복사 May 29. 2024

27화. 올라(hola)!


자석 달린 훌라후프. 그것은 운동에 대한 첫인상. 어릴 적, 하교하면 어김없이 그가 훌라후프를 돌리고 있었다. 요즘 다이소에서 파는 그런 말랑하고 매끈하며 조그만 자석 말고, 생동감이 살아있던 옛날 도자기 자석을 달고서. 안방에는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동생이 낮잠을 자고 있었다. 창으로 쏟아지던 햇살, 방울방울 떨어지던 그의 땀, 테이프에 감겨 위협적으로 돌아가던 도자기 자석. 밟으면, 레고보다 백배는 더 아팠던 자석.


지금도 한참 멀었으니, 그때는 더 심했다. 산후조리는 팔자 좋은 신선놀음 취급을 받았다. 밥 차리는 게 뭐 별거라고 그거 하기 싫어서 대는 핑계 취급. 밥하는 거, 빨래하는 거, 장보고, 청소하고, 집 가꾸고……. 그런 걸 안 하기 위해서 그런다고들 했고, 게으름피우지 말라고들 했고, 생명과 목숨이 직결된 일인데도 가볍게 무시당하고 가스라이팅 당했다. 나는 태어난 셋 중 가운데고, 동생과 나이 차가 있기 때문에 선명하게 기억한다.


하교할 때면, 해도 해도 끝나지 않는 집안일의 굴레에서 더 늦기 전에 운동을 시작한 그가 조급한 마음으로 훌라후프를 돌리다 나를 맞이해 주었다. 반겨주면서도 당혹스러워하던 눈. 나를 보물이라고 부르던 그가 내 하교 시간을 몰랐을 리는 없고, 벌써 시간이 그렇게 흐른 것에 대한 당혹감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나’와 나의 ‘부모’ 사이에서의 고민이었겠지. 나를 챙겨주어야 하는데, 그러면 자신을 챙길 수 없으니까. 슬프고 감사하게도 그는 둘 다 놓지 않았다. 훌라후프를 돌리며 말을 건네주었으니. 왔니? 오늘은 학교에서 어땠어? 엄마가 지금 운동하는 중이어서 위험하니까, 여기 오지 말고 말해 줄래? 다 듣고 있어. 들을 수 있어. 거기 앉아서 얘기해줘. 듣고 싶어. 오늘은 어떤 하루를 보냈는지. 그리고 미안. 엄마가 이거 꼭 해야 해서. 조금만 기다려주면, 맛있는 간식 줄게!


그는 다양한 방법을 탐구하고 찾아내면서 계속 무언가를 했다. 알았을 텐데. 그런다고 해서 예전으로는 영원히 돌아갈 수 없음을. 내 보호자였고 양육자였던 만큼, 지금의 내가 모르는 것들까지 그는 알았을 텐데도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았다. 자신도 내려놓지 않았고 우리도 내려놓지 않았다. 언제나 고개를 돌리면, 거기에 그가 있었다. 늘 곁에 있었다. 어떤 일이, 고난이 있어도.


그렇게 정말 많은 걸 해냈고, 가장 최근에는 암벽 등반을 다녔다. 걱정할 것을 미리 알고, 조금이든 크든 다치는 족족 숨기면서. 그런 그는 정말 앙큼하다. 그때는 그 나름으로 조심히 다니라며 잔소리를 많이 했는데, 막상 허리를 다치고 못 하게 되니 아찔한 취미였음에도 마음이 좋지 않다. 대신으로, 등산 스틱 말고 드럼 스틱을 들게 되었지만, 가끔 생각나지 않을까 싶다. 나는 이번에 복싱이라는 운동을 배우는 중인데, 어쩔 수 없이 그를 생각한다. 그에 대해서. 조금씩 나이를 먹는 만큼, 딱 그만큼 그를 더 헤아리게 되면서 잊을 수가 없어 글로 남긴다. 그의 훌라후프를. 그의 훌라후프가 충분히 돌아 멈출 때까지 조용히 기다리던 나도 같이. 지금과 별반 다를 것 없지만, 아주 다른 우리의 한 시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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