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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라니 May 23. 2024

방을 떠나 시로 가는 순한커플

순한커플의 시 필사 현장

  시 쓰기의 소재가 '비'라고 알려주니 똑순애는 별 고민 없이 쭉쭉 시를 불러준다. (똑순애가 쓰기를 여러모로 힘들어해서 똑순애가 시를 부르면 요괴딸이 받아 적는 식으로 시 쓰기를 하고 있다.) 


  봄소식 전해주는 비     ㅣ 똑순애

  

  벌써 봄비가 내리고 있어요

  봄비는 보슬보슬 내리고 있군요

  비를 맞으면 몸이 으쓱으쓱 추워도

  봄을 맞고 오니

  너무 기분이 좋아요

  나는 눈보다도 비가 좋아요

 


  '비를 맞다.'와 '봄을 맞다.' 촉촉하게 젖는 느낌. 봄비를 맞는 화자가 온몸으로 봄을 맞이하는 이미지가 그려졌다. '비를 맞으면 몸이 으쓱으쓱 추워도' 보통 으쓱으쓱은 자랑하고 싶어서 우쭐거리는 모양새로 쓰이는데, 똑순애는 어깨를 들썩이며 추워하는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비를 피하려 우산을 쓰는 것보다 좀 추워도 몸으로 으쓱대며 비를 맞는 게 으쓱댈만하지 않은가. 

  

  똑순애 시에는 의성어, 의태어가 잘 살아있다. 똑순애가 말할 때 잘 들어보면 생생하면서도 상투적이지 않은 단어가 툭툭 잘도 튀어나온다. 요괴딸에게는 그 날 것의 언어를 기록할 임무가 있다. 


  급한덕이 들어오기도 전에  똑순애가 시를 뚝딱 써버린다. 급한덕은 비에 대해 쓸 거 없다더니 밭자랑으로 시작한 시를 쓴다. 


  급한덕에게 비는 역시 곡식과 연결된다. 급한덕은 시 쓸 때만큼은 급하지 않다. 차분한덕, 침착한덕이다.  차분하게 충분히 생각하고 천천히 써 내려간다. 쓰다가 막히면 똑순애가 "이렇게 써야지." 톡 끼어들어 이렇게 하라며 알려줄라 그래서 똑순애 입을 막았다. 입이 하도 작아서 손가락 하나로도 충분하다. 입을 막는대도 말하고 싶어 꼬물꼬물. 똑순애는 자기 시를 쓸 때보다 급한덕 시를 거들 때 훨씬 더 당당하고 적극적인 모습이다. 


  급한덕은 똑순애의 의견을 받을 건 받고 쳐낼 건 쳐내면서 시를 완성한다. 똑순애의 시는 즉흥적이라면 급한덕은 시의 흐름에 꽤나 신경 쓴다. 똑순애의 시가 우연이 만들어내는 즉흥 연주곡이라면 급한덕은 한 음 한 음에 공들인 뒤, 원활하게 흐를 수 있도록 구성을 잘 엮어낸 연주곡이다. 급한덕은 시의 흐름이 막힌다 싶으면 '말이 안 된다'며 스스로에게 엄격해진다. 그때, 나는 급한덕이 쓴 부분까지 반복해서 읽어준다. 그렇게만 해도 급한덕이 흐름을 다시 잡아간다. 


  곡식비    ㅣ 급한덕

  

  밭을 삼백 평 짓고 있습니다

  비를 맞으며 봄비를 물통에 받습니다.

  비가 안 오면 곡식이 마를 때 주겠습니다.


  곡식아

  내가 니들 줄라고 물 받아 놨다.

  비가 안 오면 

  삐들삐들한 니들 살려줄게.   


  오늘도 순한커플은 시 한 편을 썼다. 서로의 시를 듣고 어땠는지 말하는 시간을 가졌다. 급한덕은 눈을 자꾸 피하며 모르겠다 발뺌한다. 반면 똑순애는 "곡식이 비를 먹으면 빙글빙글 돌면서 춤을 추고 팽팽해지는 걸 잘 표현했다."며 멋진 칭찬을 한다.  

   

 30분 정도 우리는 잠시 이 방을 떠나 시로 간다. 연필을 쥐고 글을 쓰는 손은 순한커플에게 얼마나 낯설까. 낯설고 막막한 일을 손으로 해내고 있다. 멋진 사람들.  


순한커플 필사 현장_이상교 시인의 '붕어빵' 

 

  시 쓰기는 어려워해도 시를 그대로 옮겨 쓰는 것과 낱말 적기는 아주 열심히다. 순한커플은 방바닥에 노트를 놓고 몸을 굽혀 글자를 쓰는데 꼭 요괴딸에게 절하는 것 같다. 


  급한덕의 읽기 능력은 하루새 좋아졌다. 이 나이에 이걸 왜 하는지. 모르겠다고. 자꾸 말한다. 나는 치매예방에 좋고, 이상한 딸이랑 살아서 그렇다니 급한덕은 네가 이상한 건 아냐며 반문한다. 


  급한덕의 글자가 활짝 핀 연꽃 같다면 똑순애 글자는 돌돌 말린 나팔꽃 봉우리 같다. 급한덕 글자가 일출이라면 똑순애 글자는 일몰 같다. 급한덕 글자가 단풍잎 같다면 똑순애 글자는 갈대 같다. 급한덕 글자가 포유류 같다면 똑순애 글자는 조류 같다. 급한덕 글자는 새끼를 낳고 똑순애 글자는 알을 낳을 것 같다. 급한덕 글자가 씩씩하게 행진하는 걸음 같다면 똑순애 글자는 수줍게 추는 춤 같다. 둘 다 아름답다는 말. 


  급한덕은 'ㅜ'와 'ㅗ'를 헷갈려하고 똑순애는 받침 'ㄴ'을 잘 빼먹는다. 둘 다 자신 있게 읽다가 '흩어지다'를 읽을 때는 목소리가 기어들어가며 얼버무린다. 똑순애는 손이 많이 굳어서 연필 잡고 힘주기도 쉽지 않다. 연필을 쥐었다기보다 엄지와 검지 사이에 살짝 끼워 놓은 것 같다. 연필심이 제법 닳아서 깎았다. 이 연필이 몽당 연필 될 날을 상상했다. 그 깬 잔치를 열어야지. 똑순애 글자처럼 글자춤을 춰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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