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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라니 Feb 21. 2024

징후

징후


어떤 날은 엄마가 없었으면

어떤 날은 아빠가 없었으면

어떤 날은 내가 없었으면

어떤 날은 모두 없거나 있었으면


없었으면 있었으면 하는 되풀이


죽었다가 살아났다가 다시 죽고 다시 산다

어디에 있어도 어디에 없다  


어디에 있어야 할지 모를 때

자귀나무들이 한 뼘 더 내려다본다


솜사탕 냄새 

여기 있어도 된다고 

저기를 보여준다 


어떤 날 밤 엄마가 죽음에 앞선 기침을 하면

가장 아름다운 장면을 끊어온다


한낮의 자귀나무 꽃 아래로 

엄마 밤 소리를 흘려보낸다


사랑의 징후

엄마와 나 둘만 남는다 


어떤 날 아빠는 귓속말만 알아듣는다 

아빠 귀는 멀고 내 입은 가깝다  


사랑의 징후

아빠와 나 둘만 듣는다 


그가 가진 게 가질 수 있는 게 시 밖에 없다 했다

오랜 시간 동안 시를 쓰다 시가 되었다 

그는 모르는 것 같다 


가진 게 가질 수 있는 게 돌밖에 없다

나도 돌을 쓰고 돌이 되었으면


얼마나 오랜 시간 써야 돌이 될까

시가 되었다는 게 돌이 될 수 있다는 징후


모두 없는 날

친구가 생표고 버섯을 들고 나타난다

표고밥을 지어서 파장에 비벼 먹으라 한다


빵, 책, 솜, 귤, 옷, 떡, 양말, 편지, 치킨, 흑마늘, 바다

누군가 무언가 들고 나타나준다 


해질 때까지 입은 옷은 

살구빛으로 바래고 

나도 무언가 들고 나타나고 싶다 


돌이 꿈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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