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노란 꽃 17화

그냥 그런 것

by 문창승

하루 종일 굶고 들어와

그릇째로 씹어 먹을 것만 같더니

밥 한 공기에 나른해져 눈이 감기는 건

그냥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덥고 습해 잠도 못 이루던 밤이

어느새 선선해지다 춥기까지 해

이불을 저절로 꼭 껴안게 되는 건

그냥 계절이 변해가기 때문이고


이 악물고 굳게 먹었던 마음이

조금씩 갈팡질팡하다가

어디로 튈지 모르게 물컹해지는 건

그냥 의지가 다했기 때문이다


특별하고 애절한 어떤 비극이라기보단

그냥.

그냥 그런 것이다.


운명적인 사랑에 미쳐 날뛰던 환희가

심드렁한 기류마저 귀찮은 듯 뱉어내는 건

그냥 시간이 흘렀기 때문이요

그의 말과 몸짓 혹은 존재 그 자체가

괜스레 나를 찌르고 내게 아픔을 준다면

그냥 상황이 그렇기 때문이다


악마 같은 누군가가 행복을 누리고

무고한 누군가에게 재앙이 덮치고

총칼의 나라가 평등의 나라를 정복하는 것도

그냥 세상이 그렇기 때문이다


정의의 빛을 꺼뜨리려 작정한 악의 횡포가 아니라

그냥.

그냥 그렇게 된 것이다.

그냥 그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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