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 사람’이 손해 보는 요상한 사회 구조
언젠가부터 착한 사람은 ‘호구’라는 말을 듣기 시작했다.
양보하는 사람은 바보처럼 보이고,
정직하게 사는 사람은 오히려 뒤처진다고 여기는 분위기도 만들어졌다.
그래서 요즘은 이런 말이 자주 들린다.
“착하게만 살아선 안 돼.”
“그렇게 살면 손해 봐.”
언제부터 이런 말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기 시작했을까?
사람에 대한 불신 때문일까,
아니면 착함을 보호하지 못하는 사회 구조 탓일까?
예쁜 말만 쓰라고 늘 지도하던 엄마에게
중학생 딸이 이렇게 말한다.
“엄마, 나 중학교 가서 진짜 충격받았어.
애들이 욕을 너무 많이 해.
욕을 안 하면 오히려 튀게 보이고,
만만하게 보인단 말이야.”
이런 이야기는 결코 아이들만의 현상은 아니다.
어른들의 세상도 마찬가지다.
이익을 위해 양심을 접는 사람이 인정받고,
배려보다는 무례하게 굴어야 의견이 먹히는 분위기.
선을 지키는 사람은 점점 조용히 사라지고,
선을 넘는 사람은 오히려 부러움의 대상이 되곤 한다.
우리는 또 이렇게 자신을 타이른다.
“사회에 맞춰야 산다.”
“조직에서 살아남으려면 어쩔 수 없지.”
“착한 사람보다 일 잘하는 사람이 낫잖아.”
언젠가 한 관리자의 입에서 이 마지막 말을 들었을 때,
정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제 착함이 무능력과 같은 뜻이 되어버린 걸까?
그때부터 양심을 지키며 살아온,
이른바 '착한 사람들'도 점점 지쳐간다.
양심을 숨기고, 감정을 눌러가며
‘착하다’라는 말조차 부담스러운 꼬리표가 되는 세상.
이제 착하게 행동하는 게
미덕이 아니라, 손해 보는 일처럼 여겨진다.
오히려 위험한 성향처럼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정말 그럴까? 그게 맞는 방향일까?
그래서 우리는 묻고 또 물어야 한다.
진짜 문제는 무엇일까?
‘착함’이 손해가 되는 사회,
정직한 사람이 위축되는 분위기.
이 구조는 과연 건강한 걸까?
우리가 되찾아야 할 착함은
남의 시선을 의식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에게 당당하기 위해 필요한 것 아닐까.
지금 우리가 보여주는 작은 용기가
아이들이 살아갈 사회를
좀 더 견고하고 따뜻하게 만들어 주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