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판타지/웹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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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발을 땅에 디딘 채로 날 길 원한다면 단지 길어질 뿐이야.”
목이 긴 소녀가 키 큰 소년에게 말했다.
“너는 사람이 하늘을 날 수 있다고 생각하니?”
위태로워 보이는 소년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폴론은 달에 간 적도 있어.”
소녀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얀 아치형 이마가 건축물을 연상시킨다.
“한 사람에게는 한 걸음, 인류에게는 큰 도약.”
소년은 낮게 중얼거리며 하늘을 올려다본다.
가늘고 긴 팔다리가 앙상한 나무처럼 보였다.
소년과 소녀는 달이 뜨는 모습을 지켜본다.
어스름을 지나 파랗게 물든 밤하늘이 소녀의 눈을 닮았다.
“넌 내가 하늘을 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위태로운 소년은 달빛을 받아 한층 창백해 보였다.
“넌 두 발을 땅에 디딘 채로 날 수 있다고 믿니?”
소녀는 답답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나뭇가지를 집어 들어 소년의 발치에 금을 그었다.
놀랍게도 그것은 절벽이 되었다.
“자, 여기서부터 추락선이야 뛰어내릴 수 있겠니?”
“모든 위험을 감수하고서?”
소년은 깎아지는 절벽을 근심스럽게 바라다보며 말했다.
“모든 위험을 감수하고서.”
소녀는 결연하게 말하고서 절벽을 향해 작은 몸을 던졌다.
소년은 그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서 넋을 놓고 바라보았지만
끝내 발을 떼지 못하고 길어질 뿐이었다.
그런 꿈을 꾸었다.
문제가 생겼다. 리허설 동안 단장은 사회자를 교체했다. 스폰서의 요구라고 했다. 스폰서는 아스테이아의 말투가 ‘이상하다’고 했다. 아스테이아의 자리에는 유명 연예인이라는 키 큰 여자가 마이크를 점검하고 있었다. 아스테이아의 휘파람 같은 목소리에 비하면 훨씬 굵고 단조로운 톤이다. 단장은 아스테이아의 가는 허리에 팔을 감은 채 단장실로 향했다. 아스테이아의 애처로운 얼굴이 나를 돌아본다. 오후 네 시가 되면 공연이 시작될 테고 나는 선택해야만 한다.
‘구할 것인가 말 것인가.’
다시 한 번 조건을 되새겼다. 막사는 불에 타기 쉽다. 나는 단장실 반대편 기둥부터 화약을 심어두었고 불을 붙이고 2분이면 1차 폭발이 시작된다. 4분 후면 중간 기둥과 용마루가, 6분에는 단장실 기둥이 폭발하면서 막사는 완전히 무너져 내린다. 폭발이 실패할 가능성은 없다. 라오슈가 개발한 도화선은 결코 중간에 불이 꺼지는 법이 없다. 천으로 된 입구는 순식간에 무너져 내릴 테다. 일단 무너져 내리면, 빠져나올 곳은 없다.
대기실에서 순서를 기다리며 스크린을 바라보았다. 내가 메인이므로 앞으로 네 시간의 여유가 있다. 오프닝은 광대 분장을 한 단장의 인사와 코미디 수준의 쇼다. 원숭이나 코끼리 따위가 나오는가 하면 마술과 저글링이 주를 이룬다. 단장은 이것을 밑그림이라고 불렀다. 차츰 광고가 화려해지면서 더 높은, 고난도의 곡예가 펼쳐진다. 카메라는 무대를 둘러싼 수천 명의 관객을 스크린에 잡아두었다.
하루하루가 행복한 그들이 저 번듯하고 화려한 스크린 너머를 과연 볼 수 있을까? 성노예와 다름없는 소녀와, 외로움으로 세상을 등진 채 외줄을 걷는 여자, 청각을 앗아간 폭약을 평생의 업으로 삼은 남자와 호랑이에게 팔 하나를 잃고도 남은 팔로 먹이를 준비하는 사육사,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불만에 찬 남자가 있다는 걸, 과연 알 수 있을까? 단장의 스크린은, 철문처럼 단단하게 그사이를 가로막아 두었다.
나는 암전된 무대 가운데로 걸어 나왔다. 광대분장을 했지만, 우습다기보다는 기괴한 얼굴이다. 분장은 얼굴의 화상을 막아준다. 옷에는 방염처리가 되어있고 온몸에 불을 붙여줄 특수피복을 덧입었다.
오케스트라의 비장한 음악과 함께 불꽃이 솟아오르자 무대 양쪽에 감추어진 케이지에서 카인과 아벨이 어슬렁어슬렁 걸어 나왔다. 스테로이드를 넣은 고기를 먹으며 자라난 두 괴물은 꼬리를 뺀 몸길이만 4m에 이른다. 특히 카인은 조련사의 팔을 해치운 뒤로 한동안 공연에서 제외되었다가 오늘 다시 복귀했다. 녀석은 사람 고기 맛을 알았다.
우리는 진짜 세계 속에서 환상을 만든다.
횃불을 빠르게 회전시키며 두 마리 호랑이를 응시했다. 노란 호안이 사선으로 꼬나보며 빈틈을 찾는다. 춤을 추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이렇게 움직이지 않으면 죽는다.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그 차이를 감지한다. 위기는 아름다움을 만든다고 단장은 말했다.
카인은 등허리를 세우고 과감하게 육박했다. 나는 투우를 하듯이 카인을 흘리고 입안의 튜브를 깨물어 횃불에 분사한다. 커다란 불길, 카인이 아니다. 불길은 무대 중심의 기둥에 닿았고 마침내 설치해둔 도화선에 불이 붙었다. 앞으로 6분, 호랑이 따위와 놀아줄 시간이 없다. 나는 특수피복에 불을 붙이고 장치대 쪽으로 질주했다. 카인이 맹렬하게 따라붙었지만, 몸에 붙은 불길에 더는 다가오지 못했다. 장치대는 새총과 같은 원리다. 몸을 누이고 버튼을 누르자 불붙은 몸이 13m 위로 쏘아 올려졌다. 환호성이 쏟아진다. 곧장 공중그네를 잡은 나는 온몸의 무게를 실어 다음 그네로 다음 그네로 빠르게 도약했다. 채 2분이 걸리지 않아 마지막 그네에 닿았다. 단장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단장실은 판옵티콘과 다를 바 없었다. 아래로는 모든 것을 볼 수 있고, 아래서는 아무것도 볼 수 없다. 이렇게 곡예를 하지 않는 이상, 나는 그네를 크게 뒤로 빼고 반동을 이용해 몸을 날렸다. 창문 깨지는 소리 대신 폭발음이 귀를 때렸다.
특수피복은 전부 연소했다. 단장은 창문 너머를 황망하게 바라보았다. 막사 1/3이 붕괴한 그곳에 불길과 연기가 일었다. 째지는 비명이 들린다. 가슴을 드러낸 아스테이아를 살피고 발목에 숨겨둔 단검을 뽑았다. 짐승 같은 놈이다. 단검을 던지려는 순간 단장은 아스테이아를 붙잡고 관자놀이에 권총을 들이댔다. 38구경 리볼버, 남은 시간은 3분, 러시아어로 욕설을 지껄이고 있는 단장을 어떤 식으로든 제압해야 했지만, 방법이 없다. 광대 분장을 한 단장과 나는 반라의 아스테이아를 사이에 두고 대치했다.
두 번째 폭발음이 들렸다. 막사는 반파되었지만, 아직 쓰러지지 않았다. 스크린은 여전히 광고를 영사한다. 더는 미룰 수 있는 시간이 없었다. 그때 내 눈길을 끈 것은 아스테이아의 손이었다.
‘내가 3을 세고 몸을 숙이면 그때 단검을 던져.’
수화다. 아스테이아는 손가락을 하나씩 접기 시작했다.
‘1, 2, 3.’
단검은 정확히 세 바퀴를 그린 뒤 단장의 이마에 꽂혔다. 총성이 들리긴 했지만, 아스테이아는 웅크린 채 몸을 떨 뿐 총에 맞지 않았다. 몇 초가 남았을까, 망설일 시간이 없다. 나는 아스테이아를 일으켜 세우고 단장의 머리에 박힌 단검을 뽑아들었다. 시뻘건 피와 뇌수가 엉겨왔다. 단장실 외벽을 단검으로 찢었다. 13m 위, 몸을 던질 수밖에 없다. 나는 아스테이아를 끌어안았다. 두려움에 가득 찬 눈길이 나를 올려본다.
“뛰어내릴 수 있겠어?”
물론
나는 그대로 몸을 던졌다. 오랜만에 느끼는 감각이었다. 내가 어려서 자주 떨어졌을 때, 안전그물을 등으로 받아내던 감각을 기억한다. 공중에서 몸을 비트는 1초, 1초가 영원처럼 느껴졌다. 아스테이아를 안은 채로 몸을 다 비트는 순간 폭음과 함께 단장실 쪽에서 화염이 솟아올랐다. 아스테이아는 더욱 내 품으로 파고든다. 그녀를 위해서라면 죽어도 좋다. 마지막으로 마주친 아스테이아의 눈은, 마침내 심연이 되었다.
눈이 부셨다. 붉고 형체가 없는 빛이다. 붉은빛이 얼룩지기 시작하자 온몸에 격통이 느껴졌다. 살아있었다. 손가락이 움직였다. 발가락도 마찬가지로 움직였다. 상체를 일으키자 부드러운 감촉이 미끄러지는 게 느껴졌다. 따뜻하다. 익숙한 향기가 났다. 눈은 아직도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다. 나는 그 부드러운 형체를 더듬어 보았다. 뜨겁고 끈적한 액체가 배어 나온다. 형체는 점점 제 모습을 찾아가고 있었는데, 나는 차라리 눈을 뽑아 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아스테이아다.
내가 등으로 받아냈다고 생각했던 땅에 아스테이아가 깔려있다. 붉은 피 웅덩이에 하얗게 드러난 아스테이아의 얼굴은, 형태가 없었다. 인공호흡을 하려고 가슴을 누르는 순간 몸이 가라앉았다. 갈비뼈가 산산이 부서진 탓이었다.
다시 폭음이 들렸다. 나는 무릎을 꿇은 채로 고개를 돌렸다. 붉게 타오르는 막사에서 몇 개의 불꽃이 하늘을 가로지르며 솟아올랐다. 피날레로 쓰이는 폭죽. 폭음과 함께 온통 붉은빛이, 붉은빛이 하늘을 뒤덮는다. 붉은빛은 한강에 스며들었다. 막사가 타오르는 열기가 끼쳐온다. 살타는 냄새, 비명이 들린다. 대교에는 붉은 트럭 여러 대가 사이렌을 울렸다. 한강 둔치와 대교 위의 시민들이 하늘을 올려다본다. 몇몇은 사진을 찍기도 했다. 막사는 폭죽을 몇 차례나 더 쏘아 올렸다. 내 눈에 비친 것은 어떤 기술로도 탈출할 수 없는 막막하고 붉은 장막이었다.
그동안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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