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수민 Oct 26. 2024

겨울 바다를 보며 걷는 길

겨울 바다는 쓸쓸하다고 생각했다. 한 번도 가본 적 없지만, 이미지로 접하는 겨울 바다는 잔잔하고 고요했다. 서른 살이 되기 전 여름즈음이면 비키니를 입고 해변을 거니는 게 목표였던 만큼 ‘바다’는 여름에 찾는 곳이었다. (항상 바라왔지만, 나는 비키니를 입고 해변을 거닐어본 적 없다. 몸매에 자신이 없거니와 새빨갛게 달아오른 피부를 진정시키는 일은 버겁게 느껴졌다.)


내게 바다는 여름, 해변, 모래로 고정된 이미지였다. 부산으로 이사를 온 후에도 바다에 갈 일은 없었다. 바다를 볼 수 있는 흰여울문화마을은 사람이 너무 많고, 해운대, 광안리는 멀었다. 바다 한번 보겠다고 한 시간 넘는 거리를 갈 마음은 없었다. 오며 가며 흐르는 낙동강의 윤슬만 봐도 충분히 만족하기에 굳이 먼 거리를 갈 마음이 들지 않았다.


부산으로 이사 와서 가장 아쉬운 게 한강을 볼 수 없다는 거였다. 지하철을 타고서 바라보는 한강을 사랑했다. 늦은 밤 퇴근길을 버틸 수 있었던 건 나의 힘듦과 벅참, 눌러도 새어 나오던 욕지거리를 한강이 품어준 덕분이었다. 그런데 부산엔 한강이 없다. 다이어트한답시고, 한강변을 거북이처럼 걸으며 풀벌레 소리, 강물 소리를 듣는 낭만이 이곳에는 없다. 유난히 맛있었던 한강 라면도 여기엔 없다. 처음에는 그게 그렇게 서러웠다. 한 번도 나만의 것이었던 적 없고 심지어 자주 가지도 않은 한강이 없다는 게 내겐 큰 상실감을 느끼게 했다. 이곳에서 산책은 아파트 단지를 걷는 게 전부다. 아파트 단지로 잘 조성을 해두었지만, 한강처럼 ‘오늘은 저기만큼 가봐야지’하는 게 없다. 한 바퀴를 금세 돌고 나면 어쩐지 더 아쉬운 마음이 든다.


그렇지만 부산에도 볼거리, 걸을만한 곳이 많다. 근거리 삶을 지향하는 내게 닿지 않을 뿐. 이런 나라도 서울에서 친구가 오면 멀리까지 나가기도 한다. 반려견과 사는 친구는 겨울바다를 보고 싶다고 했다. 어쩐지 낭만적인 마음이 들어 친구와 함께 해운대로 향했다. 해운대는 동백꽃까지 볼 수 있으니 ‘멍조카의 인생샷 백장 남겨줘야지’하는 마음으로 신났다. 하지만 우리 멍조카는 겁쟁이었고 한 번도 밟아 보지 못한 모래사장 걷기를 거부했다. 친구의 품만 찾는 녀석 덕분에 바다에서 뛰노는 모습을 담을 수는 없었지만, 나를 겨울바다의 매력에 눈 뜨게 했다.


사방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정신은 없고, 푹푹 꺼지거나 이리저리 날리는 백사장은 걷기 불편했지만 탁 트인 바다는 말 그대로 속이 시원했다. ‘속이 뻥 뚫린다’는 말을 바다를 보면서 했던가. 롱패딩을 입어도 자꾸만 비집고 들어오는 찬바람을 그대로 맞으면서도 바다를 포기할 수 없었다. 한걸음 멀어질수록 자꾸만 내게 더 가까이 다가오는 파도를 모른 채 할 수 없다. 얼굴의 감각이 없어질 때까지 머물러 있었다. 사람들이 왜 겨울바다를 사랑하는지 드디어 알게 됐다. 추위를 견디며 바다를 사랑하게 됐다니 어쩐지 어른이 된 것처럼 느껴져 더 좋았다. 어른이 된 지 한참이 지났는데도 뭔가를 잘 해내면 어른에 가까워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 후 겨울이면 바다를 찾는다. 사진첩 속에 2020년의 해운대, 2021년의 해운대, 2022년의 송정, 2023년 다시 해운대, 2024년 광안리가 차곡차곡 쌓여간다. 장소는 조금씩 달라져도 모두 겨울바다다. ‘속이 뻥 뚫린다’라는 말을 문자 그대로 느끼고 싶다면, 겨울바다가 딱이다.

이전 08화 여름을 추억하며 걷는 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