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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니 Aug 01. 2024

두 사람

남산 산책길에서 만난 부부를 떠올리며-

"‘의지’란 여자 대 남자의 관계 속에서만볼 게 아니라, 흔들림 가운데에오롯이 서 있을 수 있도록 돕는모든 관계에서 비춰봐야 하지 않을까."


봄의 다가옴을 알리는 첫 번째 소식은 바로 벚꽃이 아닐까. 언제쯤이면 꽃망울을 터뜨리나. 환한 벚꽃길을 걸을 생각에 온 세상이 들떠 있는 것 같다.


벚꽃을 기다리는 건 나도 마찬가지다. 주변에 벚꽃 명소가 많다 보니 벚꽃 시즌이 되면 개화 시기를 체크하게 된다. 그중 최고의 벚꽃 명소로 남산 산책길을 꼽고 싶다. 내게는 둘도 없는 힐링 스폿이 남산이다. 자연 그대로의 모습과 서울 시내를 한눈에 담으면서 벚꽃 산책길까지 걸을 때면 마치 다른 세상이 와있는 기분이다.


주말까지 연이은 출장에 여유가 없었지만, 만개 소식이 들려온 남산 벚꽃을 놓칠 수가 없었다. 인적이 드문 시간대에 산책을 해야겠다 싶어서 새벽부터 서둘렀다. 출근 전에 남산을 걷기로 한 것이다.


지하철 3호선 동대입구역에서 01A번 버스를 타고, 서울 N 타워 전 정거장인 북측순환로 입구에서 하차.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환하게 반겨주는 벚꽃과 목련의 어울림이 너무나 아름다웠다. 그날따라 하늘도 맑았고, 아침 공기도 상쾌했고, 바람 온도도 딱 좋았다. 조깅을 하는 부지런한 사람들의 모습도 참 평화로워 보였다. 생기 넘치는 러너들을 뒤로하며, 나는 천천히 나만의 속도로 걸었다. 벚꽃을 보고, 하늘도 보고, 이제 막 돋아나는 싱그러운 나뭇잎들에 시선을 맞추기도 하며.


이 길을 걷다 보니 생각나는 사람들이 있다. 근처에서 직장을 다닐 때였다. 그땐 점심시간마다 버스를 타고 올라와서 이곳을 산책하는 게 최고의 휴식이었다. 모든 생각과 감정에서 벗어나 오롯이 자연 속에서 걷기만 했던 순간. 언젠가부터는 산책하던 중 유독 눈길을 끄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부부로 보이는 두 남녀였다.


매일 같은 시간에, 같은 길을 걷고 있던 두 사람. 한 손으로는 서로의 손을 꼭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지팡이를 짚으면서 산책로 한가운데의 노란 타일 위를 걷던 이들. 아마도 시각장애인 부부인 것 같았다. 더듬더듬 바닥을 지팡이로 더듬어가던 걸음은 조심스러워 보였다. 풍경을 살필 여력이 없이 걷고 있었지만, 손을 꼭 붙잡고 서로를 의지하며 걸어가는 그들의 뒷모습이 내게는 참 아름답게 다가왔다. 그들의 발걸음을 뒤따라가면서, 이 아름다운 부부의 삶을 마음속으로 응원하기도 했었다.


아마도 이 부부 덕분에 ‘의지’라는 단어를 다시 돌아보게 되었던 건 아니었을지.


20대가 끝나갈 무렵에 10년간의 길었던 연애에 마침표를 찍었다. 한 사람과의 오랜 만남을 정리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의지’를 대하는 태도의 변화 때문이었다. 더 이상 그에게 의지할 수 없겠다는 생각과 함께, 앞으로도 그 누군가에게 의지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헤어짐’이라는 용기를 일으켰다.


그래서인지 의지하는 건 마치 나약한 마음가짐이라고 치부했던 것 같다. 늘 홀로 단단하게 서 있어야만 한다는 강박 아닌 강박을 스스로 만들었던 것 같기도 하다.


우리는 틀림없이 온전하지만, 완전할 수는 없다. 완전할 수는 없기에 관계를 맺는 과정을 통해서 성장해야만 한다. 그래서 존경할 만한 어른을 만나야 하고, 뜻을 함께하는 친구를 가까이 둬야 한다. 상황에 따라서는 인생을 먼저 살아온 눈 밝은 어른들에게 의지할 때도 있어야 하고, 결이 닮은 친구들과 호흡을 맞춰 나아갈 수도 있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건 나와 상대방의 적절한 거리 두기다. 서로가 숨 쉴 수 있을 만한 공간을 적절하게 유지하고 있느냐, 자신과 상대를 향한 사랑이 적절하게 균형감을 이루고 있느냐란 말이다. ‘의지’란 여자 대 남자의 관계 속에서만 볼 게 아니라, 흔들림 가운데에 오롯이 서 있을 수 있도록 돕는 모든 관계에서 비춰봐야 하지 않을까.


산책을 마치고 내려오며 생각했다. 점심시간 산책길에서 만났던 부부가 아름답게 느껴졌던 건 서로 맞잡은 두 손이 서로의 온전함을 더욱 빛나게 했기 때문이었다. 서로를 의지하며 걷던 걸음에는 두 사람이 지닌 장애가 아무런 걸림이 되지 않았다. 오늘도 부부는 점심시간이 되면 이곳을 산책하겠지. 벚꽃길을 걷고 있을 두 사람을 향해 온 마음으로 응원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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