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례행사마냥 밤에 일탈하듯 불날개를 시켜 먹을 때도 맥주까지는 차마 생각의 징검다리를 연결하지 못했던 나였는데 언젠가부터 불날개가 없어도 맥주는 있으면 좋겠다 싶은 사람이 되었다.
부모님 댁에 살았던 20대 초반에는 나이가 나이여서인지 집에서 혼술을 하는 게 마치 대단한 어른의 행위 같아 꽤나 멋지다는 생각을 했으면서도 정작 혼술을 실행에 옮길 때면 왠지 모르게 찔리는 마음을 외면할 수 없어 맥주를 몰래 마시기에 급급했다. 내 방은 2층, 냉장고는 1층. 물 마신다는 핑계로 냉장고에 들락거리기가 영 눈치 보여 매번 창틀에 맥주캔을 세워 두고 홀짝이다 깜빡 잊고 잠들곤 했는데 여름엔 더워서, 너무나 금세 미지근해져 버린 맥주만큼이나 내 관심도 시들해져 그랬고 겨울엔 가만있어도 으슬으슬한 날씨에 맥주까지 마시니 추위가 배가 되어 그랬다. 나중에 본가를 나온 뒤 부모님께서 내 침대 밑 숨겨둔 맥주캔들을 발견하셨을 때 퍽 민망했으면서도 완전 범죄로 마무리짓지 못했음에 아쉬움이 남았다.
혼술이 더 이상은 대단히 어른스런 행위라기보다는 그를 떠올릴 때면 뇌세포 건강이 괜스레 염려되는 요즘이지만 그래도 바쁜 하루 일과를 마치고 맥주 캔을 따는 그 소소한 즐거움은후에 온도가 더 쌀쌀해질 것이 두려우면서도 토독토독 창가에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가, 창에 묻은 빗방울에 일렁이며 번져가는 가로수 불빛이 그리워 언제고 기다려지는 가을밤 비를 마주했을 때의 기쁨과 같다.
추위와 더위를 동시에 타는 바람에 일 년 중 절반은 전기세와 가스비에 허덕일 수밖에 없는눈물 나는 몸의 소유자로서 9월 즈음부터는 산책길을드리운짤막한 그늘에 서늘함을 느낄 때마다 전기담요와 온풍기, 쇼파용 전기매트를 하나씩 하나씩 사들였다.드디어 다가온 건가. 김밥처럼 담요로 다리를 꽁꽁 싸매고 바로 옆에 히터를 틀어 둔 채 근무를 하고 있자면 이내 건조해진 공기에 볼이 발그레 물들어 군고구마가 되는 계절. 여름 내내 에어컨 바람에 얼음주머니를 즐기며 마치 말라뮤트 같은 용맹한 기개를 뽐내던 불꽃 강아지가 슬그머니 콧물을 한 두 방울 떨구며 이불속을 파고 들어와 정전기에 민들레 홀씨가 되는 계절. 영하의 아리따운 날씨에 황금빛 맥주가 얼음 결정으로 시나브로 바뀌어 가는 계절.
한 시간은 짧고 두 시간은 너무 길다. 한 시간 반이 지날 쯤 베란다 창문가에 세워둔 투명한 유리병맥주를 거실로 들여와야지. 다 얼지는 않았지만 살짝 얼을락말락, 얼음 결정이 맺히기 시작할 딱 그즈음. 천천히 조심스레병을거꾸로 뒤집어 이미 얼어버린 몇몇 맥주 결정들이 병 안을 오르락내리락 마치 오르골 안의 뽀얀 눈꽃처럼 부유하는 것을 바라보리라. 맥주가 소복이 얼어가는 계절, 바야흐로 겨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