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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안 Nov 06. 2024

가을 제주는 억새가 절정이다.

언제였을까.

비행기 안내 책자에서

제주 가을 억새는

용눈이가 내려다보이는 손자봉으로 가라.라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오랜만에 억새가 보고 싶어서

용눈이 오름을 찾아가다가

늘 다니던 길이건만

아차.하는 사이에 길을 잘못 들어섰다.


여기가 어딘가 하며 주위를 둘러보니

억새가 그야말로 절정이길래

억새에 눈이 눈부셔서

얼른 차를 세우고 보니

그곳이 손자봉오름인 거다.


오잉? 여기가 손자봉이란 말이렸다.

생각하면서 씩 웃음이 나왔다.

그렇다면 내가 또 올라가 봐야지!

차에서 내려 등산화 끈을 다시 단단히 조인 후에 손자봉을 냉큼 올라갔.



용눈이 오름이 지척으로 내려다보이는 손자봉오름은 처음이었는데

억새가 너무도 무성해서

억새 군락은  키를 훌쩍 넘었고

나를 배앵 둘러 포위했다.


정상으로 올라가는 등산로는

무성한 억새로 인해

종적을 감춰버렸다.

나는 마치 밀림을 휘저으며

앞으로 나아가는 탐험가처럼

억새 덤불을 두 팔로 휘저어 길을 만들면서

내 키보다 한참 웃자란 억새를 버석버석 밟으며 정상으로 향했다.


절정인 억새는 또 어찌나 눈이 부시던지.

이리저리 쏴아아 소리를 내면서

춤추는 억새 바다에 갇혀 혼자 서 있자니

웃음이 나는 거다.

냐하하하하


손자봉 정상위에서 주위를 내려다보니

저 멀리 역시나 억새 털옷을 온몸에 휘두른

용눈이 오름이 보이고

발아래로는 손자봉 억새들이 오름 전체를

둥그렇게 뒤덮고 있었다.


한껏 신이 난 나는 손자봉 정상위에서

보는 사람도 없으니

혼자 미친년처럼 웃어제꼈다.

냐하하하하하하ㅎ..ㅎ....

큼! 이만하면 됐다. 싶어서

미친년 같은 웃음을 그치고

언제 내가 그랬냐는 듯이 시치미를 뚝 뗐다.


정상에서 내려오자니

내려오는 길 역시 춤추는 키 큰 억새에 가려있어

억새를 밟아 길을 내며 올라온 길을 더듬으며

죽죽죽죽 미끄럼을 타면서 금세 내려왔다.



물들어 온 김에 노 젓는다고

내 코 앞에서

어서 와. 용눈이는 오랜만이지? 하며

나를 부르는 용눈이 오름으로 다시 차를 몰았다.


용눈이 오름을 유독 사랑했던

김영갑 사진작가는

봄. 여름. 가을. 겨울 용눈이오름 모습 중에서

가을을 제일 좋아했을 거다.


이렇게 아름다운 가을 햇살에

억새를 반짝거리며

부드럽고 사랑스러운 오름 곡선을 가진

가을 용눈이를 그가 사랑하지 않았을 리 없다.


사진기를 가지고 더라면 좋았을 것을.

잠시 생각했지만

작던 크던 스마트 폰이든 간에

어떤 사진기를 그 곳에 가져다대도

작품이었을 거란 생각을 했다.



늘 그렇지만

용눈이 오름은 여전히 바람이 거셌다.

바람이 거세니 억새가 미친 듯이 흔들리고

햇볕에 반짝반짝반짝거렸다.


오름 밑에서 올려다보니

정상까지 억새가

용눈이 오름 풀밭에 앉은 소 털처럼 뒤덮였는데

쏴아아 바람이 부니

오름 밑에서부터 정상까지 억새가 출렁거렸다.

억새 바다에 파도가 출렁이는 것처럼

착각이 들 정도였다.

정말 장관이었다.


혼자 천천히 걸으면서

잠시 내 친구 가족을 생각했다.

 친구는 몇 년 전 남편을 떠나보냈는데

남편이 가장 사랑하는 장소가

용눈이 오름이었다고 했다.


남편을 떠나보내고 나서

아들 둘 데리고

남편이 가장 사랑했던 용눈이 오름에 오를 때마다

친구는 늘 눈물이 난다고 했다.


나는 오름을 오르면서

남편 생각을 하면서 이 길을 걸었을

내 친구와 내 친구 아이들이

앞을 걸어가는 모습을 상상했다.


손자봉 정상에선 웃었는데

용눈이 오름 정상에선

나도 눈물이 찔끔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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