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아는 등교 시간이 참 좋았다. 배고프고 무서운 밤이 수시로 집안을 헤집어놓긴 했지만,아침이 밝으면 간밤의 슬픔은 기억하지 않아도 되는 새 출발의 여정이기 때문이었다. “다녀오겠습니다!”라고 인사하며 나설 수 있는 곳이 있지 않은가! 나를 알아주는 친구들이 있는 곳, 학교가 있었다. 하여, 학교로 향하는 내 발걸음은 날마다 봄날의 소풍길이었다.
물론 김구단 씨가 ‘담임선생님’이 되면서부터 종종 진흙탕길이 되었고 허허벌판도 되었다. 그렇다고 발걸음을 멈출 순 없었다. 어떻게 해도 담임 선생님의 칭찬을 받긴 글러먹었다면? 굳이 그에게 목 맬 필요가 없었다. 내겐 반 아이들이 있지 않는가? 자영, 명진, 수정, 유리, 상필, 형균, 대수. 일곱 명... 내 편이라 불릴만한 친구들이 너무 적어 보였다. 그렇다면? 응암동! 시장통 아이들?
내 시선은 자연스럽게 동네 아이들에게 향했다. 때맞춰 따스한 봄볕이 아이들을 집밖으로 불러내주었다. 코 밑에도 옷소매에도 까만 땟자국이 가득한 아이들이 시장통 여기저기를 쏘다니기 시작했다. 어른들은 “얘들아, 저쪽으로 가서 놀아라!” 소리치곤 했지만 그렇다고 아이들을 실제로 딴 곳으로 몰아낸 어른은 없었다.
수미의상실은 우리 가족에게 방 두 칸을 세 준 주인집이었다. 시장통에서는 제법 큰 가게였다. 흰색 바탕의 간판이 달려 있었는데, 파란색 페인트로 그려진 궁서체의 가게 이름이 인상적이었다. 그 아래에는 유리와 나무틀로 조합된 낡은 미닫이문이 늘 반쯤 열려 있었다. 그 열린 틈에선 주인집 아주머니의 재봉틀 돌아가는 소리가 새어 나오곤 했다.
그녀는 나의 모친보다 한 뼘은 더 컸고 몸집은 깡말랐다. 큰 눈과 하이얀 피부, 오똑한 콧날까지, 시장통에서는 볼 수 없는, 아니 사방천지에서 처음 보는 외모였다. 지나치게 고와서 그녀가 길에 나오면 사람들이 다 쳐다볼 정도였다.
이상한 점은 그녀의 낯빛이 ‘항상 흐림’인 것이었다. 의상실의 운영자이자 아이 셋을 둔 다복한 어머니, 게다가 주인집 아주머니란 타이틀을 쥐고 있는데 뭐가 부족해서 그런 얼굴로 사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분명 그녀는 몸이 크게 아프던지 아니면 가족 중 누군가가 불치병에 걸렸던지 그도 아니면 고아일 거라고 생각했다. 부모를 잃어버리면 어른이라도 얼마든지 그렇게 불쌍한 얼굴을 가질 수 있을 것 같았다.
“안녕?”
토요일 오후, 의상실 문턱에 걸터앉은 여자애에게 말을 걸었다.
“난 요기로 이사 왔어.”
아이가 고개를 들어 올리는데 검디 검은 단발머리가 찰랑거렸다. 머리카락에서 촤르르 소리가 나는 것만 같았다. 그 아이네 빨랫비누는 무슨 상표인지 궁금해졌다. 나중에 알고 보니 주인집은 '샴푸'란 것으로 머릴 감고 살았다.
그때였다. 아이의 얼굴이 내 코 앞으로 훅 들어왔다.
“흐메, 깜짝이야! 뭐, 뭐야? 너 눈이 왜 이래? 왜 이리 커?”
정말 놀랐다. 사람의 눈동자란 것이 그렇게 클 줄이야! 그런 내 모습이 재미있는지 아이는 살짝 웃었다. 아이의 볼에 보조개가 피어났다. 자기 어머니의 하이얀 피부와는 정반대였다. 까무잡잡하고 동그란 얼굴이었다.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언니들과 오빠는 이름 가운데에 다 '희'가 들어가 있는데 왜 나는 초아?
"여윽~시! 그래, 맞다니까! 난 말이야, 우하하, 당연히 이름도 다르지!"
난 주변을 살피며 수주의 귓가에 속삭였다.
"이거 너만 알고 있어, 있잖아, 난 초록별에서 왔어. 울 언냐들, 오빠랑은 달라. 내가 초록별에서 온 걸 아는 사람은 아빠밖에 없어. 내 이름이 초아잖아. 초록별에서 온 아이란 뜻이라니까. 수주야, 무슨 말인지 알지?"
"...... 너 좀 이상해."
'이 친구도... 초록별 얘기를 이해하지 못하는구나. 후우, 할 수 없지, 내가 이해해야지'
수주의 본마음과 상관없이 나 홀로 실망했었지만, 동갑내기 친구와의 첫 만남은 갈수록 흥미로웠다. 수주는 보통 아이들과는 다르게 말했다. 간결한데 빠르지는 않게, 일정한 속도를 유지하면서 말했다. 어른처럼 느껴졌다. 한참 대화하다 보면 내가 열 살 어린이와 말하는 건지 마흔 넘은 어른이랑 말하는 건지 헷갈렸다.
그런데 그의 말투보다 더 신기한 게 있었다. 수주의 옷차림이었다. 만날 때마다 바뀌었다. 매번 바뀌는데 매번 깔끔했다. 시장통 어디에서도 팔지 않는 옷들이었다.
한 번은 수주의 노란색 원피스를 넋 놓고 쳐다봤었다. 개나리꽃이 만개했을 때처럼 곱고 맑은 노랑이었다. 하도 쳐다보니까 수주가 당황스러웠 했다.
“이, 이상... 하니? 그렇지? 이상하지? 칫, 이래서 내가 엄마 옷 안 입겠다고 했는데. 엄만 꼭 자기가 만든 옷만 입으라네?. 다른 애들처럼 사 입으면 좋겠는데.”
수주는 의상실 사장님의 둘째 딸이었다. 서민들 사는 형편이 여러모로 소박하고 허술하던 시절이라 옷을 사 입는 것도 수월치 않았지만, 의상실이나 양복점에서 옷을 맞춰 입는다는 건 더더욱 낯설었다. 가난한 집 아이들에겐 지구에서 화성만큼이나 멀게 느껴지는 이야기였다. 나는 평소에 부잣집 아이들을 부러워하지 않았다. 하지만 엄마가 손수 만들어주는 옷을 입는다는 대목에선 눈물 나게 부러웠다.
“넌 좋겠다⋯.”
“뭐? 왜?”
수주가 진짜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을 무렵, 건조하고 까칠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정수주! 너 누구랑 얘기해? 엄마가 아무 하고나 말하지 말랬지?”
수주는 자기 뒤에 서 있는 존재를 거칠게 노려보았다.
“아무 아니야! 내 친구, 초아!”
나는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큰 두 눈을 빼고는 어디 하나 닮은 구석이 없는 자매였다. 아하, 수주 어머니와 판박이인 큰 딸이었다.
“난 초아. 넌⋯, 아니, 언니?”
“언니 맞아. 열두 살, 정수미. 의상실 간판에 써있는 이름, 우리 엄마가 좋아하는 이름.”
수주는 일사천리로 대답했다. 그 빠르기가 대단했다. 수미 언니는 놀란 기색도 없이 나를 힐끗 쳐다볼 따름이었다.
“지금 몇 신데 놀아? 엄마가 얼른 숙제하래!”
그 한 마디가 전부였다. 수미 언니는 홱 돌아서 의상실 안쪽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 꽁무니에 대고 수주가 말했다.
“야! 정수미! 네 숙제나 신경 써!”
식겁할 수준이었다. 언니한테 ‘야?’, ‘너?’, 이름까지 막 불러댄다? 우리 집에선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얼마나 놀랐는지, 쩍 벌어진 내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우린 그냥 이름 불러. 내 동생도 나한테 누나라고 안 해.”
수주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그런데 묘하게도 난 청량감을 느꼈다. 박하사탕을 처음 맛보았을 때처럼 시원했다.
수주와 어울리는 시간이 쌓이면서, 실은 그 친구네 현실이 박하사탕의 맛과는 전혀 다름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우선 수주의 어머니를 보면, 그녀는 늘 서늘한 표정으로 재봉틀 앞에 앉아 일할 뿐, 시장통 어른들과 담소를 나눈다거나 누구와 왕래하는 모습을 보여준 적이 거의 없었다. 그녀가 애지중지 아끼는 첫 딸 수미 역시, 방과 후엔 집에만 틀어박혀 지냈다. 이제 겨우 열두 살 난 아이가 도무지 동네 아이들과 어울려 노는 법이 없었다.
수주는 그래도 가게 문 앞까진 진출했다. 딱 거기까지 만이었다. 길 건너편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을 바라만 봤지 다가서진 않았다. 아이들도 수주에게 다가서지 않았다. 아, 수주 옆엔 종종 수남이가 함께 있었다. 두 살 아래 남자 동생인데, 그 아이는 제 나이보다 훨씬 어려 보였다. 말할 때면 그 목소리가 너무 작아서, “수남아! 크게, 좀 더 크게 말을 해야 남들이 듣지!” 라며 내가 누나 행세를 하기도 했다.
아무튼 수미의상실의 눈이 큰 세 아이는 언제나 깨끗하고 화려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조금 지나다 보니, 그 옷들 때문에 세 아이가 슬퍼 보였다. 나보다 더 큰 집에 살고 나보다 훨씬 근사한 옷을 입고 나보다 한참 잘 생겼는데, 방에는 흑백텔레비전까지 있는데 대체 왜 슬퍼 보였는지...
그러고 보니 수주네 아버지를 본 적이 거의 없었다. 딱 한 번, 짙은 카키빛 군복을 입은 훤칠한 사내가 수주의 어머니를 향해 “애들 잘 봐라. 당신 몸도 잘 챙기고.”라고 말하는 소리를 엿들은 게 전부였다. 수주 말로는 아빠가 군인인데 너무 바빠서 집에 못 온다고 했다. 나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들었고 그 후로는 신경 쓰지 않았다. 실은, 그가 어떤 사람인지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우리 집이나 옆집이나, 아버지란 존재는 일상적으로는 그다지 관심을 끌만한 존재가 아니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