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음식이 그리워질 때

영국가면 사다주세요

by Scribblie

나는 영국을 떠날 수 있을까? 몸이 떠나온 지 1년.


귀국하자마자 코로나때문에 현실감 없이 1년을 지내와서일까? 나는 아직도 영국에 있다. 처음에는 38년을 살고 잠시 떠났다 온 한국이 생경하게 느껴지는 재미로 지냈다. 하지만 꽤 오랜동안 몸과 달리 정신은 영국에서 한국으로 따라오질 못했는지 귀국하고 한동안 딸아이가 이상한 기분이라는 듯 “엄마 문 열고 나가면 바로 킹스턴 마켓일 것 같아~!”라고 자주 이야기했다. 사실 녀석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나도 문을 열고 나가면 영국 풍경이 펼쳐질 것 같은 이상한 착각 속에 살았었다. 영국에서 귀국 정리를 하며 늘, “한 생을 마감하는 기분이야”라고 말하고 다녔다. 한국에서 영국으로 떠날 때는 그렇지 않았는데, 영국에서 한국에 올 때는 그곳에서 삶을 마감하는 기분이었다. 그리고는 다른 생으로 넘어오는?


그리움은 입으로부터 오는 것이었나


그래도 시나브로 흐릿해져 갔다. 영국에서 사 온 워커스 칩스가 다 떨어져 버렸을 때, 애정하던 M&S의 허니캐슈넛을 다 먹었던 날, 딸아이가 그 많던 Bear YoYo가 더 이상 없다고 했을 때, 영국이 하나씩 사라져 갈 때마다 마음이 덜컥 떨어지고 또 그 애착으로부터 떨어져 나왔다. 워커스 칩스가 다 떨어져 버렸던 날엔 “나 영국 좀 갔다 올게”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처음에 식초맛 감자칩인 워커스 비니거 맛을 먹고, “이런 영국놈들 세상에 이상한 것을 다 먹는구나, 이 과자는 벌칙아니냐?!” 거의 역정이 났었다. 그런데 시간이라는 것이 무서운 것이다. 워커스의 오리지널, 양파맛, 식초맛 중에 종국에 가장 좋아하게 된 것은 식초맛이었다는 체면 안 서는 일. 워커스 칩스 없이는 못 살 것 같아서 설마 한국 어딘가에서 살 수 있겠지하는 마음에 검색을 해보니, 6봉지에 겨우 1.5파운드(2,500원) 정도였는데, 그런 걸 2배 넘는 가격에 60개씩 팔고 있었다. 그들은 아마도 감자칩이 아니라 비싼 그리움을 팔고 있었나보다.

그렇게 1차원적인 정 떼기는 여름이 되기 전에 끝났던 것 같다. 하지만, 그때부터 그립다는 감정이 싹트기 시작했다. 처음에 아기들이 자타의 구분이 없어서 엄마와 자신의 존재가 별개라는 걸 인지하지 못하고 동일시하는 기간이 있듯, 3개월쯤은 영국과 정말 영영 떨어져 버렸다는 감정적 이해를 하지 못했던 것 같다. 영국으로부터 인지적 분리가 된 이후부터 그리움이라는 씨앗이 생긴 것이다. 그런데 어찌 그것이 다 기승전식(食)으로 오냔 말이다.


차례대로 오리지널 시솔트맛, 양파맛, 최애(?) 식초맛! 영국 가면 트렁크 하나 가득 이것만 담아올 거야
윤기 좔좔, 바스락 코팅된 꿀의 크런치함이 잊히지 않는 막스 앤 스펜서 허니 로스티드 캐슈넛. 구워서 견과류의 비린 맛이 없다.
천연 과일을 갈아 뭉쳐놓은 요요처럼 생긴 아이들 간식. 무첨가!를 믿고 먹어본다.


그리움이 먹을 것이라니, 누가 영국에서 귀국하면서 뭘 사가면 좋겠냐고 물었을 때, “워커스 칩스”라고 대답할 뻔해서 참 모양새 빠질 뻔했더랬다. 속으로 ‘날 사다 주면 안 될까’라고 까지. 딸아이와 나는 집 근처에 있어 자주 가던 사슴이 뛰노는 그 유명한 리치몬드 파크 안에 존 러셀경의 생가였던 펨브로크 로지를 사랑했고, 자주 갔다. 학교 끝나고도 갑자기 펨브로크 로지?!!하면서 훅 쏘았고, 둘이 맞는 외로운 주말 오전에도 따스히 해가 드는 자리에 앉아 브런치를 했다.

영국에는 벤치를 기부하는 문화가 있는데, 거기엔 ‘언제부터 언제까지 산 누가’, 혹은 ‘여기서 일했던 누가’라고 벤치 등받이에 세월가도 빛바랠 뿐 사라지지는 않도록 명패를 금속으로 못질해준다. 딸아이와 나는 펨브로크 로지에 벤치라도 기부하고 이름을 아로새겨야 하는 것 아니냐며 우스게 소리를 했었다 그런데 그 이유가 딸아이는 쫀득거리는 초코쿠키와 카모마일차, 나는 두툼한 레몬 아이싱이 얹힌 무거운 시트의 레몬케이크에 홍차였다. 날이 갈수록 한국에서는 찾을 수 없는 그 영국 스타일의 레몬 케이크를 실현시켜야겠다는 의지가 굳어져갔다. 하지만 1년이 다 가도록 생각만 부지런했을 뿐.


크리스마스 저녁 식사, 로스트 터키 말고 치킨 앤 그레이비

몇 달째 딸아이가 지나가다가 한 번씩 “엄마, 코로나 끝나면 피터쉠 호텔에서 자고, 펨브로크 로지에 가서 터키 & 그레이비를 먹자.”라고 뜬금없이 하는 이야기에서 어린 아이의 그리움에서도 찌릿한 통증이 감지되었었다. 나의 머리와 마음에도 터키를 접시에 덜고 투박하게 그레이비를 툭 둘러주던 그 제스처가 스쳤다. 아이는 너무 가고 싶으니 영국 이야기는 꺼내지도 말라며 나의 회상조차 틀어막아버리기도 한다. 한편 다행이라는 생각도 했다. 나와 둘이 했던 영국 생활이 고생스럽게 기억되지 않고 아름다워 아릿한 기억으로 남았구나 싶어서.

그래서 몇 달째 만들어 주겠다고 입으로만 약속했던 그레이비소스가 곁들어진 로스트 치킨을 크리스마스에는 실현시켜줘야겠다는 결심이 섰다. 한국에서 통 칠면조를 구한다는 건 시도해볼 일이 아닐 테니 패스. 그레이비소스 정도는 있지 않을까 싶어서 인터넷으로 찾아봤지만 모두 해외배송이어서 크리스마스 날짜에 맞추기는 어려웠다. 칠면조는 치킨으로 하기로 하고, 그레이비소스는 만들어보기로 했다. 이게 아닌 거 같은데, 이게 아닌 거 같은데 하면서 만들다가 4종의 그레이비소스가 상에 올르고 말았다. 하지만 딸은 모두 그 맛이 아니라 했다.


잉글리쉬 브렉퍼스트

우리집 꼬마가 크리스마스 전날 갑작스러운 특명을 내렸다. 아침은 잉글리쉬 브렉퍼스트야. 그래 그래도 그건 쉽지. 물론 메쉬드 포테이토나 빈도 안좋아하니까 뺌으로써 일은 간단해졌고, 곡물에 순대 같이 피를 섞어 만든 소시지 블랙푸딩도 굳이 필요 없으리라. 우리가 곁들일 수 있는 야채를 조금 곁들이는 걸로 크리스마스의 아침을 맞기로 했다.

가족이 다 모이는 크리스마스를 위해 영국에서 바리바리 싸들고 온 크리스마스 그릇들
한국식 잉글리쉬 브렉퍼스트로 아침을 맞은 크리스마스


킹스턴 마켓 길을 걷다가, 어떤 식당 입간판에 ‘English Breakfast All day’라고 써 있는 것을 보고 ‘하루 종일 허름하게 먹는다’라고 읽고 혼자 킥킥 거렸었다. 영국인 기준에서 아침부터 저녁을 먹는 듯한 거대한 ‘한국인의 식사가 식사지, 영국인들은 매끼 간식을 먹네.’라고 생각했기에 그 간판이 우스웠다. 그래도 그들은 수프 한 그릇, 아니면 토스트에 우유로 아침을 먹는 것에 비하면 잉글리쉬 브렉퍼스트가 엄청 잘 차려먹는 아침인 것이다. 그래서 영국에 입성해서 떠날 때까지 잉글리쉬 브렉퍼스트는 쳐다보지도 않았는데, 그래도 막상 떠나려니 한번 먹고 떠나야겠구나 싶어, 맥주를 마시러 한 번씩 들락거리던 집 근처 펍 알버트에서, 짐을 빼던 날 아침 잉글리쉬 브렉퍼스트를 먹었었다. 그래도 그날만큼은 맛있게! 먹었다.

다시 봐도 그렇게 대단할 것 없는 잉글리쉬브렉퍼스트 @집을 빼던 날, The Albert


크리스마스 하루, 종일 영국의 그리움으로 배를 채웠다. 로스트 치킨을 끝으로 어제 저녁 딸아이가 초콜릿으로 케이크 토퍼를 만들었던 레몬 케이크를 잘라 입에 한입 넣고 입에 향이 퍼지는 순간, 우리는 동시에 행복한 탄성을 질렀다. “좀 다르지만, 그래도 이거야!”한국에서는 구하기 어려운(구하기 어려울 줄 몰랐다, 트와이닝스 홍차는 한국에서도 흔하니까) 디카페인 얼그레이로 입을 가시니 그리던 펨브로크 로지에 순간 이동했었다.

우리를 영국으로 공간 이동시켜준 레몬케이크. 슈가파우더가 550g쓰였으니 오늘은 건강은 잊는 걸로..


펨브로크 로지의 아침 햇살 아래 레몬케이크와 진득하게 우릴 수 있는 홍차, 우유는 물론 공짜, 심플한 빌레로이 보흐 찻잔.

꼭 그렇게 있을 때는 모르고 지나야만 그것이 행복이었던 알게 되는 똑똑치 못한 내 마음조차도, 그것이 행복인 줄, 그때도 알았다.


영국 음식이 그리울 때...





영드로 보는 영국 이야기
처칠은 진짜 영국 영웅이었을까? in 크라운 - 4일 만에 12,000명을 죽음으로 몰고 간 처칠의 리더십, 런던 스모그


크리스마스 영국 이야기 시리즈


1편 : 크리스마스에 낭패 본 일 in 런던-조금 불편한 현실, 그리고 위험한 여행


2편 : 영국 사람들은 크리스마스를 어떻게 보낼까? 시크릿 산타


3편 : 런던 겨울 여행, 고성에서 즐기는 이색 스케이트 - 헨리8세의 갈망적 사랑, 천일의 앤 그녀를 위한 성 햄튼코트팰리스


4편 : 환상가득 런던 크리스마스, 랜선 겨울 여행 코로나 시대 랜선 여행 - 중세 분위기의 크리스마스 마켓으로 시간 여행


5편 : 영국 크리스마스 초등학교엔 무슨 일이?!

6편 : 런던 주택가에 크리스마스가 내리면 - 이건 분명 커튼 트위처가 되어 훔쳐봐 달라는 것이다!


7편 : 런던 크리스마스 여행, 리버티 백화점 런던, 크리스마스 시즌에 꼭 가봐야할 소소한 명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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